2022. 3. 18.

[인터뷰 시리즈: 글자-마음 보기집] #3 ‘빙그레 싸만코체’ 디자이너 이찬솔

 

[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세 번째 인터뷰이

‘빙그레 싸만코체’ 만든 캘리그라퍼 겸 폰트 디자이너 이찬솔

 

 

 #가구디자인_전공 #감성보다_이성을_믿는편 #메소포타미아_문명 

 

“가구 디자인 전공생도 폰트 디자이너 될 수 있답니다.”

  저는 가구 디자인 전공입니다. 전공만 본다면 글꼴 디자인과는 거리가 꽤 있어요. 하지만, 한글을 이용해 가구를 만들다가 한글을 이용해 폰트를 만든다는 맥락이 같아서 접근이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폰트는 디노마드, 마켓히읗, 윤디자인그룹 타이포아트스쿨 등 외부에 개설된 교육 과정을 통해서 우선 접했어요. 그리고 입사 후에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은 후 실무에 투입되었습니다.

 

“디자인은 감각의 영역이 아니에요.”

  디자인은 감각으로 하는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감각으로 하는 디자인은 오래할 수 없어요. ‘학습’하는 디자인이 더 지속력 있고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책, 사이트, 영상 등을 통해 수시로 인풋을 많이 넣고 있는 편입니다. 표현력을 끌어올리고 싶을 때는 핀터레스트나 인스타그램에서 리서치를 하고 이론은 책으로 얻는 편입니다. 폰트는 시대에 따른 역사적 흐름이 있기 때문에 폰트 역사 도서는 꼭 읽어봐야 해요.

 

“솔직히, 제가 만든 폰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진 않아요.”
  제 손으로 탄생시킨 폰트는 정말이지 제 자식과도 같은데요. 이걸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란 어려운 게 당연하죠. 하지만 저에겐 다양한 관점을 가진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내 폰트를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동료들에게 많은 질문과 의견을 구하는 편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수용하기보단 내 콘셉트에 맞는 피드백인지 나름대로 판단한 후 적용하는 방식으로 폰트의 퀄리티를 높이고 보완해 나갑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쐐기 글자 | 출처: BBC News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쐐기 글자’ 영수증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어요.”

  폰트 역사 얘기가 나와서 한 가지 얘기하고 싶은 게 떠올랐어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쓰였던 ‘쐐기 글자(cuneiform)’라는 게 있어요. 쐐기 글자로 적힌 유적이 좀 재미있어요. ‘내 양 몇 마리를 빌려갔으니 언제 언제까지 갚을 것’이라는 내용이에요. 당대의 차용증 내지는 영수증이죠. 인류 문명 초창기에 기록된 글자의 흔적이, 그럴싸한 명언이 아니라 ‘빌려간 양을 갚으라’라는 거잖아요. 그 양을 빌려간 사람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까요?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쓰인 영수증을 보며 누군가가 이렇게 자신의 서사를 전할지를요. 그리고 양은 갚았을까요? 우리의 문자 생활과 타이포그래피라는 건 이렇게 개개인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찬솔 디자이너의 레터링 작업들

 

 #미지의세계_홟 #레터링하려고_연차쓰는_디자이너 

 

“글자 잘 그리는 팁? 계속 배울 것, 그리고 혼자 그리지 말 것!”

  폰트를 그리는 방법은 우선 매체나 강의, 혹은 입사 등을 통해서 우선 배우고 많이 그리는 것이 제일 좋아요. 고등학교 시절처럼, 우선 선생님께 배우고 복습을 하는 원리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배움을 토대로 많이 그리다 보면 각자 더 빠르고, 정교하게 그리는 노하우들이 생깁니다.

 

  그리고 작은 팁을 드리자면, 글자를 많이 안 그려본 분일수록 혼자 그리지 않는 걸 추천드립니다. 혼자 그리면 균형이 맞는지, 가독이 되는지, 표현이 잘 되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어서 틀에 갇히게 되는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저처럼 디자인 회사에서 소속되어 폰트를 배울 때의 이점도 있습니다. 돈을 받으면서 배우니까, 저 혼자 돈을 내고 배울 때보다 더 열심히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웃음)

 

“저는 ‘’ 같은 글자를 좋아해요.”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글자, 그리고 많이 쓰이지 않는 글자. 이 두 경우가 디자인하기 가장 까다로워요. 많이 쓰이는 글자들은 말 그대로 많이 쓰이기 때문에, 사용자들의 미감이 상당히 올라가 있습니다. 조금만 어색해도 눈에 불편함을 줄 수 있죠. 그래서 더 공을 들입니다.

 

  많이 쓰이지 않는 글자는 제작자조차도 생경해서 구조 맞추기가 어려워요. 이를테면 ‘’ 같은 글자가 그렇죠. 평생 살면서 이런 글자를 쓸 일이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웃음)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입장인 거고요, 누군가는 쓸지도 모르잖아요. 원론적인 얘기겠지만, 그래서 폰트 디자이너는 모든 글자를 잘 만들어야 해요. 저는 ‘’처럼 사람들이 많이 쓰지 않는 글자를 좋아합니다. 뭐랄까,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느낌이랄까요.

 

“개인 폰트 출시요? 음, 아직은 이른 것 같아요.”

  언젠가 디자이너 이찬솔의 개인 폰트를 출시할 수도 있겠지만, 윤디자인그룹 소속인 상태로 개인 폰트를 따로 준비하려는 마음은 없어요. 아직은 회사 안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진행해보는 것이 재미있고, 무엇보다도 개인 폰트를 선보일 만큼 실력이 올라오지 않은 상태라서요. 하지만 레터링 작업은 꾸준히 할 계획입니다.

 

  입사 전에는 ‘1WEEK 1LETTER’라는 나름의 원칙을 세워두고 일주일에 하나씩 레터링 작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입사 후에는 페이스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도 개인 작업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틈날 때마다 레터링을 하고 있습니다. 출퇴근 때나 수다떨 때, 게임을 할 때 등 언제든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노트에 스케치를 해둡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회사에서 업무로 폰트를 만들 때보다 저 혼자 레터링을 할 때가 이따금 더 재미있기도 합니다. 그럴 때 가끔 연차를 쓰고 집에서 혼자 레터링을 해요.

 

 

이찬솔 디자이너가 손글씨 원도 및 폰트 개발을 담당한 ‘빙그레 싸만코체’

 

‘빙그레 싸만코체’ 손글씨 원도 및 이모티콘(붕싸티콘) 스케치 노트

 

이찬솔 디자이너가 개발에 참여한 ‘현대카드 유앤아이뉴’ | 이미지 클릭 시 개발 후기를 보실 수 있습니다

 

 #노력형운명론자 #인생폰트_빙그레싸만코체 #한글에_올인 

 

“폰트 디자이너의 흔한 ‘부캐’, 캘리그라퍼.”

  2012년부터 캘리그라퍼로 10여 년째 활동하고 있어요. 폰트 디자인을 시작하기 전에는 단순히 글씨를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면서 감각적인 글씨를 많이 썼던 것 같은데요. 폰트를 배우면서부터는 한글의 ‘구조’를 익히기 위해 이성적이고 읽기 편한 글씨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폰트 디자이너가 꼭 손글씨를 잘 쓸 필요는 없죠. 하지만, 손글씨를 잘 쓰면 글자의 획순에 대한 감이 생기고 표현력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건 제가 폰트 디자이너이자 캘리그라퍼로서 확실하게 보장할 수 있습니다.

 

“캘리도 폰트도 직접 담당한 첫 프로젝트, 빙그레 싸만코체!”

  손글씨 폰트인 ‘빙그레 싸만코체’의 원도 글씨를 제가 직접 쓰고 폰트까지 제작했어요. 캘리그라퍼 겸 폰트 디자이너로서 완성한 첫 번째 프로젝트였습니다. 물론 가장 만족스러웠던 프로젝트이기도 하고요.

 

  빙그레 싸만코체는 기존 빙그레체 시리즈(빙그레체, 빙그레체Ⅱ, 빙그레 따옴체, 빙그레 메로나체)의 다섯 번째 폰트였는데요. 빙그레의 대중적 아이스크림인 붕어싸만코를 글자로 표현하기 위해 정말 수백 장 넘는 글씨를 썼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어요.(웃음) 이 작업을 계기로 윤디자인그룹에 입사해 TDC 소속 폰트 디자이너가 되었답니다. 입사와 동시에 그야말로 밤낮없이 싸만코체 제작에 매달렸어요. 즉, 싸만코체는 제 첫 자식(?)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최애 프로젝트로 제 마음에 남아 있을 것 같아요.

 

전문 캘리그래피 작가로 활동 중인 이찬솔 디자이너의 글씨들

 

이찬솔 디자이너가 ‘인생책’으로 꼽는 소설 『천사들의 제국』 | 이미지 출처: 교보문고

 

“제게도 ‘인생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천사들의 제국』, 저한테는 엄청 강렬한 책이었어요. 천사들이 한 사람의 평생을 하늘에서 지켜본다는 내용인데요. 게으르게 살았던 제가 ‘나에게도 나를 돌봐주는 천사가 있겠구나’라는 의식을 갖고 부지런한 인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천사들의 제국』을 계기로 ‘노력형 운명론자’라고 제 스스로 가치관을 만들었어요.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운명론자와 달리 ‘노력’하는 것 자체가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인생이 바뀌었으니 ‘인생 책’ 맞죠?

 

“평생 디자인만 하진 못하더라도, ‘한글’에는 평생을 올인하고 싶어요.”

  ‘폰트 디자인’을 평생 직업으로 삼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글’이라는 것은 평생 제 삶을 바치고 싶은 대상이에요. 가구 디자인을 할 때도 ‘한글’을 활용해 의자를 만들었고, 캘리그래피를 할 때도 ‘한글’을 썼습니다. 지금은 ‘한글’ 폰트를 제작하고 있고요.

 

  한국의 디자이너가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는 다양한 요소들 중에서 ‘글자’라는 것이, 그중에서도 ‘한글’이 가장 힘이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무언가를 낯설게, 즉 새롭게 만든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만큼 성공의 희열도 크죠.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한글을 어떻게 낯설게/새롭게 표현할 것인가. 이 고민과 늘 씨름하고, 이 고민의 답을 어떻게든 찾아내는 존재가 바로 폰트 디자이너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슬럼프라는 걸 딱 한 번 겪은 적이 있는데요. 그때 아는 분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었어요. ‘슬럼프라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 경지에 다다랐을 때 나타나는 것인데, 너는 그 경지에 다다랐는가?’ 힘들 때마다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그리고 한글을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 ● ● [글자-마음 보기집]은 계속 이어집니다: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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