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두 번째 인터뷰이
오늘도 그리고 짓는 ‘미술·건축 전공’ 폰트 디자이너 방성재
‘내 폰트 = 내 새끼’라는 어쩔 수 없는 진심
그만큼 ‘내 새끼’를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 노력해요
“폰트 디자인이란? 막연했던 이미지를 글자로 구체화하는 작업.”
폰트 개발은 무수히 많은 연결고리들을 만지고 다듬는 과정이기에 짧게는 3개월에서 1년, 길게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폰트를 의뢰 받게 되면 먼저 프로젝트를 맡은 팀원들과 해당 브랜드의 모든 것을 조사합니다. 이 브랜드가 어떤 가치와 문화를 추구하는지, 어떤 키워드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폰트를 사용하고 있는지 막연했던 이미지들을 하나둘 찾아가며 구체화하죠. 그 다음엔 리서치한 자료를 기반으로 시안을 작업합니다.
시안 작업을 할 때는 용도를 많이 생각하게 되는데요. 이 폰트의 쓰임이 제목용인지 본문용인지, 게임이나 광고 등 이미지성을 많이 띄는 폰트로 사용되는지에 따라 방향성을 정합니다. 방향성이 정해지면 시안자[字]에 해당하는 짧은 문장부터 디자인하고 클라이언트와 조율해가며 점점 글자를 늘려가는 방식으로 제작됩니다.
클라이언트와 작업하는 경우엔 클라이언트의 요청으로 네이밍이 이뤄질 때도 있는데요. 자사 폰트의 경우 본인의 아이디어와 함께 일하는 폰트 디자이너들의 아이디어를 받아 가장 어울리는 폰트명을 붙입니다. 글꼴의 특징이 잘 부각되며, 이름만 들어도 인상과 정보를 한번에 알 수 있고, 디자인과 힘을 합쳐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이름을 짓는 것. 폰트 개발의 마지막 도장을 찍는 일이라고나 할까요.
“폰트 디자이너의 영원한 숙제, ‘완성도’와 ‘차별성’.”
폰트를 제작할 때 가장 고충인 부분은 아마도 차별성인 듯 싶네요. 내가 만든 폰트와 비슷한 폰트가 이미 있진 않은지가 가장 많이 고민되는 점 같습니다. 자세히 보면 다르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폰트를 스쳐 지나가며 보기 때문에 미세한 차이로는 차별성을 주기 어렵죠. 한눈에 다르게 보이면서도 퀄리티 있는 폰트가 가장 좋은 폰트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본문용 고딕을 만들 때는 더욱 많은 부분을 신경 쓰게 됩니다. 본문용 고딕 같은 경우는 그 특징의 차이가 정말 미세해서 폰트끼리의 구별이 어렵거든요.
“솔직히, 제가 만든 폰트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기가 쉽진 않아요.”
제 손으로 탄생시킨 폰트는 정말이지 제 자식과도 같은데요. 이걸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기란 어려운 게 당연하죠. 하지만 저에겐 다양한 관점을 가진 동료들이 있기 때문에 내 폰트를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동료들에게 많은 질문과 의견을 구하는 편입니다. 거기서 모든 것을 수용하기보단 내 콘셉트에 맞는 피드백인지 나름대로 판단한 후 적용하는 방식으로 폰트의 퀄리티를 높이고 보완해 나갑니다.
“ㄱ부터 ㅎ까지 전 과정을 제가 진행한 폰트가 곧 공개됩니다!” 🐻
곧 출시 예정인 ‘구미베어 폰트(가칭)’에 가장 애착이 갑니다. 구미베어 폰트는 “윤디자인에는 없던 틀을 깨는 폰트를 만들어 보자!”라며 야심 차게 시작한 프로젝트예요. 네모틀 안에 젤리가 끼어 있는 볼륨감 있는 형태가 특징입니다. 전에 없던 스타일로 제작하다 보니 자소 하나하나 그려야 했고 글자들 하나하나 안에 저의 노력이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많이 힘들기도 했고, 초반 기획부터 파생, 홍보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제가 다 진행한 폰트였기에 애착이 많이 갑니다.
방성재가 기획, 제작, 파생, 홍보 등 전 과정을 책임진 ‘구미베어 폰트’(가제), 2022
엔씨소프트 게임 〈리니지2M〉 전용글꼴, 2019
― 개발 후기 보기 ―
날마다 글자를 그리고 짓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그리고 짓고 싶어요.
“폰트 디자이너가 된 이유요? 어쩌면 ‘건축’을 배웠기 때문인지도 몰라요.”
대학교 때 미술 외 건축을 전공했습니다. 건축을 배우게 된 건 호기심 많은 저를 자극하는 분야였기 때문이죠. 제가 만든 작업이 큰 건물로 탄생한다는 점이 꽤나 매력적이었습니다. 건축을 전공하며 사람과 공간, 공간들 간의 상호관계, 사람들의 동선에 대해 배웠고 그럴 때마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공간이 정말 많은 상호작용 안에서 태어나는구나 생각하게 됐죠. 선들을 맞춰가며 공간을 분배하는 건축의 성질이 폰트와 굉장히 비슷하게 느껴져 폰트의 세계로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실은··· ‘폰트 디자인 회사’라는 게 있는 줄도 몰랐어요.”
폰트에 대한 관심을 깨달았던 건 시각디자인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면서 입니다. 제 작업물에 꼭 맞는 폰트를 찾기 어려웠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폰트에 관심이 생기면서 찾아보게 됐습니다. 작업물의 제목을 내가 디자인해 넣으면 더 어울리고 내 개성을 잘 드러낼 수 있겠단 생각이 들면서 폰트 디자인을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폰트와 타이포에 대한 관심이 커졌습니다.
처음엔 윤디자인그룹이라는 회사를 모를 정도로 폰트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점차 관심을 가지고 조사하면서 폰트 회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포트폴리오를 끝마칠 때쯤 주변에서 “폰트 디자인 회사에 들어가서 배우면 좋을 것 같다” 얘기를 많이 들었죠. 그때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폰트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폰트 디자이너의 흔한 출퇴근 루틴을 공개합니다.”
출근하면 제일 먼저 자리를 세팅합니다. 퇴근할 때면 항상 책상 위와 의자를 열 맞춰 정리해 두는데요. 출근과 동시에 몸의 방향에 맞게 아이패드와 키보드들을 앞으로 당겨 최적의 상태로 세팅을 합니다. 제가 나름 팀의 DJ를 맡고 있는 터라 그날 상황에 맞는 노래를 틀고, 분위기를 봐서 신청곡도 받으며 서서히 작업을 시작합니다. 폰트 작업을 시작하다 보면 주변의 글자들이 먼저 보입니다.
우연히 사이트를 서치하다가도 ‘어? 이 폰트 뭐지, 이 폰트 이상한데, 이 폰트 안 어울리는데?’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곤 합니다. 오전 업무를 마치면 점심을 먹고, 오후 업무를 하고, 퇴근 시간이 되면 자리를 정리하고 노래를 점점 페이드 아웃으로 끄고 퇴근합니다. 퇴근 후엔 저녁을 먹고, 집에 있는 시간엔 주로 아이패드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렸을 때부터 원래 그림을 많이 그려왔고 좋아하기도 해서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는 편입니다.
한글과컴퓨터 캐릭터 ‘말랑말랑무브먼트’ 전용글꼴 ‘한컴 말랑말랑’, 2021
조선일보 창간 100주년 기념 ‘조선100년체’, 2020
방성재의 ‘퇴근 후’ 작업: 톰 크루즈 일러스트레이션, 2022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로서 꼽아본 소소한 ‘꿀복지’ 하나!”
윤디자인에서 근무하면서 가장 좋았던 것 두 가지. 첫 번째로 분위기 좋은 사무실이죠. 일반적인 형광등이 켜진 삭막한 사무실에 비해 포근한 아이보리 조명에 원목테이블 사이사이로 스탠드들이 놓여 있어 카페에서 작업을 즐기는 사람들에겐 적합한 환경이지 않을까 싶네요. 두 번째는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복리반차가 꽤 좋은 혜택입니다. 금요일에 복리반차를 쓰면 주말에 2.5일을 쉴 수 있는 셈이라 어디를 놀러 가거나 개인적인 일을 처리해야 할 때 많은 도움이 됩니다.
“폰트 디자이너라고 꼭 글자에서만 영감을 얻진 않아요.”
저는 폰트 외 다른 여러 분야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전공을 여러 개 한 영향도 있는 것 같네요. 폰트 디자인을 하기 전에 꼭 글자만 보지 않고 그림이나 건축물을 본다든지 그래픽 작업, 다양한 캐릭터들을 보며 영감을 얻습니다. 문자가 아닌 또 다른 예술 분야에서 모티프(motif)를 따서 어느 한 부분의 요소를 가져와 표현하면 글자들만 봤을 때 나오지 않을 아이디어들이 저만의 디자인, 저만의 색깔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폰트 디자인과 문화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폰트를 주제로 행사를 진행하게 된다면 미디어 아트와 그래픽 아트가 형형색색으로 구현되는 이벤트를 열어보고 싶네요. 보통 폰트 행사다 하면 “흑백에 글씨만 많고 재미는 많이 없는 것 같다”라는 얘기가 들릴 때도 있거든요. 누구나 즐기고 사진 찍고 참여할 수 있는 전시를 열어보고 싶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글자를 체험하거나 누구나 쓰고 가질 수 있는 굿즈를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이런 활동들을 통해 폰트 디자인과 문화를 사람들이 더 많이 알고 가깝게 느끼도록 하는 게 저의 목표입니다.
● ● ● [글자-마음 보기집]은 계속 이어집니다: 시리즈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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