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YPE÷] 인천 개항로에서 「개항로」에 관해 나눈 타입 디자이너들의 스몰토크

 

2023년 연재 콘텐츠 [TYPE÷](타입나누기)는 윤디자인그룹 TDC(Type Design Center)가 제작하여 새로 출시한 서체, 즉 타입(type)에 관해 나눈 타입 디자이너들의 스몰토크입니다. 서체를 만든 담당 디자이너의 영감과 제작 의도, 비하인드 스토리, 그리고 동료 디자이너들의 관점은 또 어떨지. 하나의 서체를 주제로 그 서체와 어울리는 공간에서 타입 디자이너들이 대화를 나누고 이를 기록하여 들려드립니다.

 

여덟 번째로 나눈 타입은 이정은, 이가희, 이찬솔, 김류희 디자이너가 제작한 「개항로 가로」(🔗폰코에서 자세히 보러 가기)입니다. 인천 개항로에 자리한 전원공예사 전종원 작가의 목간판 글씨를 원도로 제작한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 서체에 관해 다섯 명의 타입 디자이너와 한 명의 에디터가 그 어느 때보다 오래 이야기를 나눠봤습니다.

 

 

글. 정이현

사진. 문하나, 장연준, 이정은, 이찬솔, 김류희, 정이현

 

 

 

개항로÷(이정은+이찬솔+김류희+장연준+문하나)

 

「개항로」를 제작한 이정은, 이찬솔, 김류희 디자이너

 

장연준, 문하나 디자이너 그리고 정이현 에디터

 

 

@인천 개항로: 전원공예사 -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 - 개항로통닭

개항로체와 어울리는 곳이 개항로가 아닐 수 있을까. 서체와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공간을 늘 찾아 헤매던 우리에게 로컬 타이포 브랜딩, 개항로체에 관해 이야기 나눌 곳으로 다른 후보지는 없었다. 왕복 3시간을 여럿이서 이동해야 한다는 부담에도 우리는 기꺼이 인천 개항로로 떠났다.

먼저 들른 곳은 개항로체 원도 작가이자 개항로에서 오랫동안 목간판을 만들어온 전종원 사장님의 가게, 전원공예사. 가게에 들어서자마자 풍겨오는 짙은 나무 냄새에는 무수한 시간이 켜켜이 쌓여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강인한 글씨와는 다르게 푸근한 미소로 맞아주시는 전종원 사장님께 서체 견본집과 함께 서체가 무사히 출시되었음에 감사한 마음을 전해드렸다.

곧이어 향한 목적지는 이정은 디자이너가 개항로체를 만들기로 마음을 먹게 된 개항로 투어의 방문지 중 한 곳이자, 개항로체 최종 계약이 성사된 곳, 〈개항로 프로젝트〉로 40년이 넘은 산부인과 건물을 리모델링한 일광전구 라이트하우스다. 일광전구는 〈개항로 프로젝트〉를 이끄는 권순만 브랜드 디렉터가 브랜딩을 담당하는 곳이기도 하다. 병원 건물 뒤로 연결된 사택을 개조한 별관에서 개항로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타입나누기가 끝난 후에는 라이트하우스를 나서 개항로 곳곳을 둘러보았는데, 전종원 사장님의 목간판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개항로의 작은 잡화 백화점, 개항백화와 소금 창고로 쓰던 잇다스페이스 등을 구경한 후 여름밤에 빠질 수 없는 개항로통닭의 야외 테이블에서 개항로체 출시를 축하하는 뒤풀이를 가졌다. 물론 개항로 맥주와 함께.

 

 

 

정은 개항로체가 8월 11일에 드디어 출시됐어.

 

이현 항상 정은 디자이너가 해주던 질문, 소감이 어떤지.

 

정은 늘 인터뷰어의 입장에 있다가, 반대로 인터뷰를 당하는 인터뷰이가 되니까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되네. 일단 기쁘고 개항로체가 시작부터 많은 스토리가 있었는데, 끝까지 잘 이어져온 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물론 형태를 조금 더 만지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모든 것은 손을 놔야 하는 순간이 늘 있기 마련이니까. 여름이 지나기 전에 출시하고 싶었는데, 하게 돼서 너무 후련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있어. 둘은 어때?

 

찬솔 지금껏 여러 서체를 많이 작업해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스토리적으로 풀어낼 게 많아 특별했어. 또 이전에 가구 디자인도 하고 캘리그라피도 써온 입장에서 조각과 글씨가 접목된 서체를 개발한다는 것은 전무후무한 경험이 되지 않을까 해서 더 뜻깊어.

 

류희 나도 나무에 새긴 글씨라는 점에서 개항로체는 정말 특별한 서체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는데, 같이 참여할 수 있게 되어서 좋았고. 확실히 일반적인 붓글씨와는 다르게 나무에 판 느낌을 되게 잘 살렸잖아. 그래서 공부도 많이 됐어.

 

 

 

 

정은 일반적인 붓글씨와 다르게 나무에 판 느낌이 난다는 건 류희가 얘기해서 더 신뢰가 가는 것 같아. 서예 전공자가 그렇게 얘기해주니까. 개항로 폰트가 1월부터 작업이 시작됐는데, 7개월 동안 한 종이 나오는 스케줄은 사실 아주 무리는 아니야. 근데 초반에 우리가 너무 힘들었잖아. 뼈대 글씨 잡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됐고, 원도가 생각보다 충분치 않아서. 전종원 사장님께서 55년 동안이나 작업을 해오신 게 굉장히 많을 텐데, 아카이빙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원도 수집하는 과정이 너무 어려웠어. 그리고 작업을 하다 보니 일반 붓글씨와는 획의 느낌이나 결이 굉장히 다른데, 대체 무엇이 다른 건지를 발견해내는 과정도 오래 걸려서 후반 작업할 때 시간이 부족하더라고. 야근을 엄청 많이 했지.

 

이현 개항로체 작업은 어떻게 역할 분담을 했는지 먼저 설명해주면 좋을 것 같아.

 

정은 개항로 서체를 만들어보자고 기획한 건 나와 가희 디자이너야. TS 연재를 보면 알겠지만, 작년 봄에 이곳 라이트하우스에 우연히 왔다가 개항로 맥주를 처음 보게 됐지. 다른 정보 없이 ‘개항로’ 세 글자만 쓰여 있는 게 되게 인상적이어서,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봤어. 그렇게 개항로라는 지역과 〈개항로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됐고, 폰트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기획한 거야. 제안서를 공들여서 만들고 〈개항로 프로젝트〉에서도 같이 해보자고 해서 전원공예사 사장님을 설득해 본격적으로 시작했어. 그런 다음 원도를 바탕으로 내가 200여 자 정도 만들고, 찬솔 디자이너가 파생 과정을 진행했고. 또 나중에 류희 디자이너가 합류해서 나와 작업을 마무리했는데, 한글에 좀 부족한 부분이나 특문, 라틴 부분을 수정해서 완성했어. 지금은 가로쓰기 한 종이 나왔는데, 개항로체가 목간판에서 시작된 만큼 세로쓰기 버전은 꼭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 세로쓰기는 공간 배분이 달라지는데, 이건 나와 류희 디자이너가 진행할 예정이야.

 

이현 그러면 그냥 우연히 개항로에 놀러 왔다가 서체까지 만들게 된 거네?

 

정은 맞아. 내가 구글맵에 가고 싶은 장소에 핀을 꽂아두는데, 여기가 오랫동안 꽂혀 있었어. 개인적으로 이런 공간을 좋아하거든. 오래된 공간은 진짜 많은 시간을 품고 있고, 또 품으면서 풍화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건축물에 새로운 콘텐츠가 입혀지는 거잖아. 시대의 트렌드가 덧입혀지기도 하고. 그래서 이런 재생 건축물을 보는 걸 되게 좋아해. 커피를 시키고 기다리다 우연히 개항로 맥주를 보게 되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진짜 개항로체를 가지고 이곳에 다시 와서 이런 얘기를 나누는 지금이 너무 놀라워. 정말 우연에서 시작한 거야.

 

 

 

 

이현 신기하다 정말. 아까 원도가 많이 부족했다고 했는데, 그럼 없는 글자는 어떻게 만든 거야?

 

찬솔 전종원 사장님께 약간 빙의해서 사장님께서는 이렇게 글씨를 쓰시고 목간판에 옮겨 깎으셨겠구나 상상을 하는 거야. 계속 획을 살펴보고 또 쪼개고 어떻게 흐름을 가져가겠다는 것을 분석하고 상상하면서 글씨를 써갔어. 그래서 없는 글자꼴, 예를 들어 ‘박’은 있는데 ‘악’은 없다면 이응꼴은 다른 글자를 보면서 이런 흐름으로 갔겠다고 생각해서 쓰는 식으로 작업을 했던 거지. 없는 글자들이 많았는데, 일단 섞임모임꼴이 민글자 ‘화’ 하나밖에 없어서 섞임모임꼴은 거의 다 상상해서 그렸어.

 

정은 섞임모임꼴은 류희 디자이너도 고생을 많이 했지.

 

하나 찬솔, 류희 디자이너가 각각 초반과 후반에 글자를 만들었으니까, 각각 작업한 부분에서 제일 어려웠던 글자가 좀 다를 것 같은데, 생각나는 글자가 있어?

 

정은 일단 대부분 어려웠어!

 

하나 찬솔 디자이너가 원도를 해석하고 다듬는 게 어려웠다면, 류희 디자이너는 그걸 파생하고 좀 다른 글자로 만드는 게 많이 어려웠을 것 같아.

 

 

 

 

찬솔 나는 치읓이 가장 어려웠던 것 같아. 왜냐하면 원도에서 치읓꼴도 많지 않았는데, 가로모임 치읓은 그래도 몇 자 있었는데 세로모임 치읓은 아예 없었거든. 그래서 지읒이랑 시옷이랑 히읗, 이런 글자들로 추론하면서 그렸어.

 

 

 

 

류희 작업이 어느 정도 됐고 빈출이 가능한 글자들이 있는 상태에서 내가 받아서 파생한 거라 크게 어려웠던 부분은 없는 편이야. 그래도 그중에서 어려운 글자를 뽑자면 기역꼴의 섞임모임. 나는 글자에서 여백이 많으면 더 어렵다고 느끼거든. 그래서 그 부분에 고민이 많았고, 어느 정도 기울여야 할지 두께를 얼마만큼 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어.

 

정은 처음에 원도 수집을 하고 보통 추가로 요청을 드리는데, 이 무드와 똑같이 글자를 받으려면 사실 진짜 파야 하잖아. 목간판을 만드는 과정 그대로 종이에 붓으로 쓰고 외곽을 따서 나무에 옮기고 파고 칠하고, 이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당연히 이런 과정을 거치면 몇 글자 나오기 힘들고 일단 전종원 선생님께서 연세도 있으셔서 이걸 부탁드리기에는 무리가 있었어. 그래서 그냥 붓으로 한 300자 정도 추가로 써달라고 요청을 드렸지. 계속 부탁을 드렸거든, 숙제라고. 근데 막상 받았는데, 나무에 새긴 글자와는 인상이 너무 달라서 어떡하지란 생각이 들더라고.

 

 

목간판 원도와 추가 원도

 

 

이현 원래는 큰 종이에다 크게 쓰시던데…

 

정은 그리고 파내야 꺾인 부분이 있는데, 이건 그냥 붓으로 쓴 거잖아. 그래서 상상력을 많이 발휘해야겠다고 생각했어. 목간판을 만드신 그 글씨를 가지고 출발하되, 흘림의 양식이라든지 획이 이어지는 부분, 이런 거는 추가 붓글씨 원도에서 참고하자. 쓰는 건 아무래도 개인의 습성이 있으니까. 특징은 원래의 나무 원도에서 가지고 갔고, 작업하다 막막하면 붓글씨 원도를 봤어.

 

이현 그럼 원도를 가장 잘 살린 글자는 뭐야?

 

정은 검수 과정에서 쌍기역을 계속 바꿨으면 좋겠다고 요청받았는데, ‘깨’, ‘꺼’ 등 민글자에서 쌍기역은 앞에 기역이 더 올라오고 두 번째 기역이 내려와. 폰트는 우상향하는 느낌이 있는데, 이건 반대로 가고 있잖아. 사실 폰트는 통일성이 되게 중요한데, 이런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나오면 안 되고, 둘 다 같은 높이로 와야 하거든. 초반 검수 과정에서 이걸 바꿨으면 좋겠다고 윤랩에서 얘기하셔서 우리도 고민을 많이 했어. 원도를 보면 ‘까’ 자가 있는데, 사실 단차가 더 심하고 기울기가 크게 있어서 이것도 많이 완화한 거거든. 진짜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결국 원도에 가깝게 민글자에만 특징을 가져가기로 결론이 났어. 또 개항로의 기역꼴은 반듯하게 내려오는데, 사실 시옷꼴이나 지읒꼴, 치읓꼴 같은 경우도 어떤 거는 붓글씨처럼 빠지는 게 있고, 어떤 거는 깎아서 조금 직선적인 게 있거든. 이런 거를 하나로 통일하지 않았어.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런 게 다 거슬릴 수도 있는데, 전체적인 무드는 통일성 있게 보이도록 가자고 합의했지.

 

찬솔 조금의 차이는 개항로의 아이덴티티를 여실히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이렇게 단차가 떨어져 있는 글자는 거의 없으니까, 이걸 보면 개항로 서체라고 알 수 있게끔. 그래서 원도에 가깝게 작업을 했지.

 

 

 

 

정은 ‘항’ 자 보면 중성에서 종성으로 이어질 때 되게 두껍게 내려오는 편이거든. 이거는 붓으로 쓰면 이렇지 않았을 텐데 나무로 작업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

 

찬솔 처음엔 매끈하게 작업했다가 일부러 직선적인 부분을 좀 더 넣었어.

 

하나 사실 이렇게 만들기로 선택하기가 쉽지 않잖아.

 

정은 개항로체는 어쨌든 나무를 깎고 파내서 칠했다는 것을 계속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

 

류희 폰트를 만들다 보면 뭔가 매끈하게 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이 있는데, 작업하면서 파인 느낌을 표현한 걸 보는데, 너무 멋있더라고.

 

하나 재밌었던 것 중 하나가 이 ‘뮤’라는 글자가 원도 기반과 다듬어본 형태 중에서 원도 기반으로 결정됐다고 TS 서체 개발기에서 봤는데, 실제로 나온 ‘뮤’는 또 다르더라고.

 

정은 막판에 바뀌었어. 서체 개발기 작성하고 나서.

 

하나 그래서 이 ‘뮤’ 하나를 가지고 서로 의견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아. 왜 이렇게 된 거야?

 

 

 

 

찬솔 나는 이거 작업할 때 나무 위에 깎았다는 속성에 맞췄거든. 원래는 좀 부드럽게 했다가 왼쪽으로 꺾여져 있는 획이 개항로체만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류희 최종 검수 단계에서 이 형태가 원도와 결이 다른 것 같다는 의견이 있어서, 원도를 살려서 이 꺾인 부분을 살짝 띄워서 표현하는 것으로 수정했어.

 

정은 더 역동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연준 그럼 이번엔 특수문자 얘기를 좀 해줘. 칼 쥐고 있는 손이 있던데.

 

정은 라틴이랑 특문 영역은 가희 디자이너가 1차로 진행해줬고, 그거를 조금 더 디테일하게 수정하는 후속 작업을 나랑 류희 디자이너가 맡아서 했어. 이 손 같은 경우는 원래는 그냥 일반적인 손이었는데, 목장갑을 낀 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처음에는 이렇게 좀 큰 조각도를 쥐고 있는 손을 그렸어. 남편이 그림 그리는 사람인데 이걸 보더니 칼을 내려찍는 살인마의 손 같다고 얘기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도저히 못 그리겠다고 좀 그려서 보내 달라고 부탁해서 남편이 5분 만에 그려서 보내줬어. 이 그림으로 이렇게 완성했지.

 

 

 

 

하나 이것까지도 나무로 깎은 듯한 느낌을 너무 잘 표현한 것 같아.

 

연준 그럼 이번엔 마음에 드는 글자!

 

류희 나는 좀 뻔하지만, ‘개항로’ 진짜 좋아해.

 

이현 맥주에 있는 글자와 최종 폰트가 똑같아?

 

정은 개항로 원도를 서체 디자이너의 눈으로 보면 일단 크기감이 안 맞는 부분이 있어. 초성과 중성 사이가 너무 가깝기도 하고. 이런 부분들을 서체화하면서 좀 많이 조정했어.

 

찬솔 나도 좀 뻔한 거 해도 되나, ‘솔’ 좋아하거든. 이름이라서가 아니라 리을을 제일 많이 만졌어.

 

하나 리을 들어가는 글자가 솔밖에 없는 건 아닌데…

 

찬솔 그러면 ‘솔’ 말고 ‘솖’ 할게. 겹종성이다 보니까 균형을 비롯해 좀 많이 만졌고, 또 시옷에서 중성으로 이어지는 형태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많이 시도했거든. 그냥 꺾어서 완전히 나무 조각 느낌 나게도 해보고, 연결해서 깎는 것도 해보고, 아예 부드럽게도 했었고.

 

 

개항로체에서 찬솔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솖' 자, 정은 디자이너가 좋아하는 '맥' 자

 

정은 ‘개항로’ 글씨에 가장 애정이 많기는 한데, ‘맥’ 자가 좋아. 사실 원도에 없던 글자인데, ‘마’의 미음과 ‘백’의 종성 기역꼴을 조합한 거거든. 개항로체가 개항로 맥주에서 시작되기도 했고, 보리라는 뜻 말고도 서로 연결해준다는 의미도 있잖아. ‘맥이 통한다’, ‘맥이 흐른다’, ‘맥을 잇다’ 이런 의미에서도 좋고. 기역꼴이 내려오는 부분이 강하게 힘이 느껴져서 마음에 들어.

 

이현 아까도 잠깐 얘기가 나왔는데, 붓글씨와 다른 목간판 글씨의 특징은 구체적으로 어떤 거야?

 

류희 붓글씨 같은 경우는 번지거나 뭉치거나 그런 부분이 좀 부드럽고 흐르는 듯한 느낌이 있다면, 목간판 글씨는 아무래도 깎았다 보니까 획이 연결되다가도 튀어나와서 꺾이거나 하는 느낌이 있어. 목간판 작업을 해본 적은 없지만, 새김의 흔적이 보이는 게 목간판의 매력이고 조각 작품의 매력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너무 부드럽거나 매끈하면 기계적으로 팠다는 느낌이 나지.

 

찬솔 손때가 묻어나는 게 가장 큰 특징인 것 같아. 붓글씨도 물론 손맛이 느껴지는데, 목간판은 한 번 더 깎으니까 중첩된 손맛이 느껴지거든. 그래서 매끄럽게 기계가 깎은 듯한 느낌이 안 나도록 손맛을 살려서 작업했어.

 

정은 굉장히 기계적이지 않은, 진짜 손맛이 나는 서체가 나왔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왔을 때 하길 잘했다, 시작하길 잘했다고 느꼈어.

 

연준 그럼 〈개항로 프로젝트〉에서는 당연히 이 서체를 쓰겠지만, 이 외에도 혹시 서체가 쓰였으면 하는 곳이 있을까?

 

정은 일단 내년에.. 개항로에서 싫어할 수도 있으려나? 많이 홍보되는 목적으로만 생각한다면, 내년에 선거가 있거든. 이게 굉장히 굵기도 하고. 그러면 일단 파급력은 있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찬솔 가장 공격적인 마케팅인데?

 

정은 하지만 이건 로컬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져가는 글자기 때문에…

 

찬솔 선거 포스터에 들어가는 글자들 분석하는 사람들 꼭 있거든. 그래픽 디자이너나 폰트 디자이너들이 이거 어떤 폰트를 썼다 분석하는 사람들.

 

정은 노이즈 마케팅이네. 나는 정말로 개항로에서 잘 써줬으면 좋겠어. 개항로 곳곳에서 이 글자를 만나기가 아주 쉬웠으면 해. SNS나 굿즈, 포스터나 가게 간판, 사이니지, 메뉴판이나 축제에서나. 개항로 안에서 정말 잘 사용됐으면 하는 게 가장 큰 바람이야. 실제로 개항로에서 많은 걸 하고 있거든. 지금도 행사를 기획하고 계시는 것 같고, 인천이 그런 걸 너무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이현 개항로체가 로컬 타이포 브랜딩 사례로 주목받고 있는데, 최초의 사례라고 봐야 하나?

 

정은 제안서를 쓸 때 비슷한 사례로 배민에서 나왔던 을지로체를 분석했어. 을지로에서 많이 보이는 글씨를 가지고 개발한 건데, 찾아보니까 글씨 장인 한 분이 페인트통을 들고 돌아다니면서 글씨를 썼다고 하더라고. 근데 그분에 대한 정보는 일단 없고 현재 남아있는 글씨를 취합해서 폰트를 만든 거야. 물론 너무 잘 만들었는데, 무명의 장인이라는 점에서 좀 다르지. 개항로체는 이 글씨를 누가 썼는지 정확하게 밝힐 수 있고, 지금도 실제로 개항로에 계시는 분이니까. 또 칠성조선소체는 할아버지 대부터 운영해온 칠선조선소에서 아버지가 목선에 써넣었던 글씨를 디지털 유산으로 남기고 싶어서 아들이 개인적으로 의뢰해서 개발하고 배포한 거야. 그래서 이건 속초를 대변한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고, 하이퍼 로컬에 가깝다고 생각해. 개항로체는 더 넓은 개념이고 〈개항로 프로젝트〉의 목표와 의미, 이런 게 다 맞아떨어져서 로컬 타이포 브랜딩의 너무 좋은 케이스가 된 거지. 로컬 문화의 붐과 함께 운 좋게도 더 파급이 있었던 것 같아.

 

이현 개항로체를 개발하면서 여러 곳에서 강연 제의나 글 기고 요청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TS에 연재한 서체 개발기를 보고 연락이 온 거야?

 

정은 대부분 TS에서 글 보고 연락을 주셨다더라고. 그냥 글꼴 하나 만들어 배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처음부터 어떻게 만들어가는지 수많은 고민과 해결을 고스란히 기록하고 보관해놓고, 이걸 또 다른 사람들이 읽고 어떤 영감을 받는 이 모든 과정이 굉장히 의미 있고 좋았어.


이현 지난 주말에 오프라인 강연이 있었다고.

 

정은 참 신기해. 내가 살면서 TED 강연을 하게 될 줄이야. 서체 디자이너를 찾았던 게 더 크긴 하지만, 로컬에 대한 관심이 많은 때기도 하니까 이게 딱 맞물려서 나에게 좋은 기회가 왔던 것 같아. 강연이 끝나고 애프터 파티가 있었거든. 거기서 청중들과 스태프들이 질문을 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폰트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어. 질문이 너무 많이 쏟아져서 끝나고 목이 쉴 정도였어. 몇 시간을 계속 얘기하는데도 다들 눈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폰트에 관한 질문을 해주니까, 나 진짜 더 열심히 해야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하나 나도 갔었는데, 되게 흥미로웠던 게 주제가 여백이었거든. 폰트를 여백이라고 설명하면 대부분 어울리지만, 개항로체는 어떻게 여백으로 연결할까 의문이었는데 되게 잘 풀어냈더라고. 그래서 궁금한 게 자유 주제라고 한다면 개항로체를 무엇으로 소개할 건지.

 

정은 시간과 세월에 대한 얘기를 할 것 같아. 개항로체는 서체만, 형태만 소개하는 건 재미가 없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과정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에 개항로라는 곳에 대해 내가 공부를 많이 했던 거고. 올해가 공교롭게도 인천항 개항 140주년이거든. 개항로체에 140년이 담긴 건 아니지만, 모본을 작업하신 분의 오랜 노고와 세월의 힘이 녹여져 있잖아. 개항로 자체도 굉장한 역사의 레이어에 있다 보니까, 그 시간의 힘이 만들어낸 글씨가 아닌가 생각하게 돼.

난 류희에게 질문하고 싶은 게 성광체 작업하고 또 바로 개항로체 작업을 했잖아. 성광체는 질감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가고 번짐이 많았던 서체고, 이건 같은 붓글씨긴 하지만 되게 다른 느낌이잖아. 여기서 모드 전환이 잘 됐었는지.

 

류희 너무 잘 됐었어.

 

정은 프로다.

 

류희 개항로 작업할 때 성광체를 먼저 해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이현 세로쓰기는 어떻게 작업할 예정이야?

 

류희 성광체도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를 작업한 거였는데, 개항로체는 반대로 가로쓰기를 가지고 세로쓰기를 제작하는 케이스잖아. 성광체 작업하면서 쓰기 방향에서 나오는 특징을 어떻게 살릴 것인가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긴 했지만, 아쉬운 부분이 많았어. 그래서 개항로체는 나뿐만 아니라 세로쓰기 작업을 해보신 분들과 많이 얘기 나눠보면서 방식을 정립하고 작업을 시작해보려고.

 

 

이현 언제 출시야?

 

정은 11월 말로 예상하고 있는데, 예상과 딱 맞아떨어졌으면 좋겠어.

 

이현 성광체 비트맵도 출시하잖아.

 

정은 그건 9월 말. 지금 류희가 엄청 바빠. 진짜 하반기 별이야.

 

이현 혹시 로컬 타이포 브랜딩을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또 다른 지역이 있어?

 

정은 이 질문 TED 미팅 때 오거나이저분들이 물어보셨는데, 사실 관심 가는 지역이 있어. 개인적으로 전라도 순천의 동천 일대나 중앙동에 꽂혀 있는데… 그래도 우선 개항로 사례를 더 탄탄히 잘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회사와 합의가 필요하지만, 추가로 개항로 맥주에 있는 크랙 버전도 내고 싶어. 그리고 개항로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었을 때 되게 재미있는 글자들이 많았거든. 그런 글자들도 폰트로 만들면 좋겠더라고.

 

이현 그럼 마지막 질문. 앞으로의 계획은? 개항로 세로쓰기?

 

정은 맞아. 개항로 세로쓰기가 우선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어. 범용성을 위해 가로쓰기가 먼저 나오긴 했지만, 개항로체의 시작을 생각한다면 세로쓰기 버전이 먼저 나오는 게 더 맞았다고도 생각해. 〈개항로 프로젝트〉 측에서도 세로쓰기가 꼭 나왔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붓글씨 느낌의 서체들은 세로쓰기로 많이 활용하는 편이잖아. 세로쓰기 전용 폰트가 아니면 정렬이라든지 이걸 다 직접 조정해야 하는데, 세로쓰기가 있으면 훨씬 더 활용하기 좋으니까. 그리고 로컬 타이포 브랜딩이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는 만큼 진짜 로컬에 기여하는 서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너무 커. 다행히 〈개항로 프로젝트〉 그런 이해를 잘하고 계신 것 같아서 잘 사용해주실 거라 기대하고 있고. 나도 개항로에서 만났던 다양한 표정의 글자들을 조금 시간차를 두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폰트로 선보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야.

 

 

 


타입나누기 도중, 〈개항로 프로젝트〉의 권순만 디렉터가 우리를 찾아왔다. 그와 나눈 또 다른 이야기는 번외편에서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