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판인쇄’라 하면 왠지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한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대단히 엄숙하고 고전적인 느낌이랄까요. 저만의 편견인지는 모르겠으나, 납활자로 인쇄물을 찍어낸다는 작업이 30대 초반에 불과한 일개 회사원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장인의 영역’처럼 다가옵니다. 몇 해 전, 국내 유일의 활판인쇄소라는 파주 활판공방을 취재했을 때에도 줄곧 경직돼 있었던 듯합니다. 특히 이곳 대표님으로부터 활판인쇄 과정에 대한 설명을 듣는 동안에는 줄곧 부동자세였습니다.
활판공방 취재는 저로서는 매우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었던 일과였고, 활판인쇄라는 영역을 실체적 질감으로 느낀 첫 경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활판인쇄에 대한 저 나름의 인상은 마치 증조부나 고조부를 떠올리는 듯하게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활판공방 박한수 대표님의 설명을 진지하게 경청하는 저의 모습
비메오(Vimeo)나 유튜브(Youtube)에서 타이포그래피 관련 영상을 검색해보고는 합니다. 업무에 필요해서이기도 하고, 그냥 개인적 관심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에 무심코 ‘letterpress’라는 키워드를 검색해봤는데, 꽤나 근사한 영상들이 많이 나오더군요. 무엇보다도,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제 또래쯤 돼 보이는 젊은 사람들이 활판인쇄기를 직접 다루고 있었고, 영상미 또한 다이내믹했지요. 그런데 무엇보다도, 활판인쇄로 만들어내는 현재진행형의 결과물들이 코스터(coasters), 위스키 포스터 등 퍽 일상적인 소품들이었습니다. ‘아, 이런 것들도 활판인쇄로 찍어내는 거구나’라는 인식이 생기고 난 뒤에야, 활판인쇄라는 것이 조금이나마 만만해진 기분이 들었습니다. 더 나아가서, 활판인쇄는 분명히 지금 이 순간, 동시대의 많은 영역들과 더불어 작동 중인 ‘활성화 상태’임을 자연스레 알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몇 해 전의 활판공방 취재에서 저는 스스로 닫힌 마음으로 활판인쇄기 앞에 서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어 얼마간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활판공방에서 직접 찍어본 간이 명함
(사진 속 손의 주인공은 함께 동행했던 디자이너 님.)
물론, 활판인쇄는 분명 요즘의 인쇄업계에서 주인공 대접은 힘들지도 모릅니다. 뭐, 그렇기는 합니다만, 여전히 활판인쇄는 누군가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중이고, 그렇게 완성된 결과물을 애호하는 누군가도 존재하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유행의 흐름이라는 것 못지않게 소수의 취향과 단독성 역시 지켜지면 참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여전히 블루레이나 DVD보다는 VHS를 선호하는 쪽도 분명히 있는 법이니까요. 확실히 해외에서는 그런 소수의 취향을 존중하는 문화가 (적어도 한국보다는) 보편화된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자신이 세운 활판인쇄소 ‘P98a’에서, 에릭 슈피커만
/ 출처: http://vimeo.com/95682050 (아래 출처 동일)
‘P98a’에서 활판인쇄기를 다루는 젊은 사람들
사설이 길었습니다. 이제 각설. 비메오와 유튜브에서 찾은 활판인쇄 관련 영상 일곱 편을 소개해드립니다. 혹시나 저처럼 활판인쇄를 할아버지 대하듯 깍듯했던 분들이 계시다면, 아래 영상들을 통해 활판인쇄도 우리만큼이나 젊고 쾌활하며 앞으로도 계속 활발히 움직일 것임을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활판인쇄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단계별 설명과 함께 알려주는 영상
/ 출처: ‘Letterpress’ on Vimeo
에릭 슈피커만이 세운 활판인쇄소 ‘P98a’ 들여다보기
/ 출처: ‘Letterpress Printing at P98a’ on Vimeo
“활판인쇄는 아주 잘 살아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어느 활판인쇄공을 조명한 짧은 다큐멘터리
/ 출처: ‘STUKENBORG’ on Vimeo
위스키 브랜드 ‘잭 다니엘’의 활판인쇄 포스터 제작 과정
/ 출처: ‘Jack Daniel's Does Letterpress’ on Vimeo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이 쓴 대표시 ‘예언자’를 인쇄하다
/ 출처: ‘LetterPress - Printing Kahlil Gibran’ on Vimeo
활판인쇄로 코스터 제작하기
/ 출처: Letterpress Coasters on Youtube
활판인쇄와 수작업 장정으로 한 권의 책이 완성되기까지, 그 예술적 과정
/ 출처: The Art of Making a Book on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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