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13.

[글자와 비평] ‘이야기가 술술술’ 주류 로고·패키지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

 

글자가 일이자 생활인 타입 디자이너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글자를 그저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때론 날카로운 시선으로 분석하고, 때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감상합니다. [글자와 비평]은 글자를 바라보는 타입 디자이너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기록하여 글자로 전합니다.

 

첫 번째 비평한 글자는 바로 술, 주류 로고·패키지 디자인과 타이포그래피입니다. 이를 위해 윤디자인그룹의 타입 디자이너 9명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글. 정이현

 

 

 

글자와 비평 첫 번째. 술과 글자

 

참석: 이정은, 장연준, 박현준, 문하나, 김미래, 이예형, 김류희, 김지연, 박준영

진행: 신동윤

 

동윤 좋아하는 술 혹은 타이포그래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술이 있는지.

 

예형 술을 전혀 못 해서 무알코올만 마실 수 있지만, 화요의 캘리그래피를 얘기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 수묵화를 좋아하거든요. 병이 흰색이라 화선지에 쓴듯한 느낌이 인상적인데요, 로고는 강병인 캘리그래퍼가 자연물을 표현하여 쓴 것으로 알고 있어요. ‘화’ 자는 매화가 피어오르는 모습, ‘요’ 자는 신선들의 모습과 흘러 내려오는 폭포 같은 느낌이 나고, 구도도 훌륭해요. 최근 우리 회사가 출시한 성광체처럼 질감이 있는 폰트가 인기가 많아질 것 같아서 관심 있게 봤어요.

 

화요의 로고는 강병인 캘리그래퍼가 자연물을 표현하여 썼다. / 사진 출처: 화요(hwayo.com)

 

미래 술 종류를 잘 몰라 패키지가 예쁜 것들에 눈길이 가는 편이에요. 그래서 좋아하는 술보다 먹어보고 싶은 술, 간바레오또상 얘기를 해보려고요. 역시 패키지가 예뻐서 골랐는데, 백그라운드는 원고지로 되어 있고, 아이가 쓰고 그린 것 같은 투박한 글자와 그림을 볼 수 있어요. 간바레오또상은 일본의 불황 시절에 지쳐가는 샐러리맨을 위해 출시한 저렴한 사케인데, 아이의 일기장이라는 스토리텔링이 마음에 들어요.

 

간바레오또상 / 사진 출처: 태산주류(taesanliquor.com)

 

정은 새로를 정~말 좋아합니다. 제로소주라는 의미로 소주 고유의 초록 병을 투명으로 바꾸고 병의 세이프도 달리했어요. 소주 브랜드의 로고는 주로 캘리그래피 스타일을 쓰는데, 새로는 정제된 글자로 써서 말 그대로 이름처럼 새로웠죠. 제로칼로리 소주가 필수적인 것만 남기고 모든 걸 비워낸 것처럼, 새로라는 글자도 기존 소주 로고와 비교할 때 중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털어낸 느낌이에요. 이렇게 남겨진 글자는 꽉 찬 네모 틀의 고딕으로, 레트로하면서도 세련되고, 글자의 두께도 너무 두껍지 않고 심플하죠. 기존 소주의 문법을 다 바꿔서 좋았는데, 맛도 좋았어요. (웃음)

 

새로의 로고는 꽉 찬 네모 틀의 고딕으로 세련되고 심플하다. / 사진 출처: 롯데칠성음료(company.lottechilsung.co.kr)


하나 저는 진로이즈백을 좋아해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옛날 진로의 느낌을 되살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일단 맛이 깔끔해서 마음에 들어요. 소주로는 처음 파란색을 썼는데, 병 자체가 예쁘다는 이유로 먹어도 좋겠어요.

한자 로고를 사용하여 옛날 진로의 느낌을 되살렸다. / 사진 출처: 하이트진로(hitejinro.com)


동윤 최근에 진로 제로슈거가 나오지 않았나요?

정은 전체적인 디자인을 깔끔하고 젊게 했는데, 여기서 새로가 더 진일보했다고 생각해요. 새로가 작년 9월에 나오고 약 3천만 병이 팔렸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진로가 위기를 느껴 올해 1월에 뒤늦게 출시한 것 같은데, 디자인은 좀 실망스러워요. 진로이즈백인지, 제로슈거인지 한눈에 안 들어오고... 내가 디자인했다면, 색은 기존과 같이 가되, 글씨는 좀 더 현대적인 느낌으로 써서 디자인을 다르게 가지 않을까 해요. 한자보다 좀 더 현대적이고 컴팩트하게!

현준 핑크는 좀 없앴으면… 혼동되기도 하고, 파란색과 핑크의 조합이 식상해요. 저라면 기존 브랜드가 있으니까 한자는 그대로 하고, 제로 표시를 크게 했을 것 같네요.

하나 사실 진로의 라이벌은 새로가 아니라 참이슬과 처음처럼이라고 생각해요. 새로는 맛이 다르거든요. 맛을 비슷하게 느끼는 세 가지는 진로, 참이슬, 처음처럼. 진로 로고의 한자는 예뻐서 좋아요.

현준 가장 많이 마시는 건 진로지만, 좋아하는 술은 잭 다니엘. 맛있기도 하고 브랜드 얘기가 재미있어서요. 잭 다니엘의 가장 큰 특징은 정사각형으로 된 병과 컬러예요. 당시 위스키는 남성들이 많이 마시는 술이라, 흰색과 블랙을 썼죠. 그리고 대부분 병이 원형이었는데, 차별성을 주기 위해 사각형으로 했다는 설과 마차에서 굴러다니지 않도록 했다는 설, 또 유통이나 보관할 때 더 편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어요.

잭 다니엘 로고를 바탕으로 Jasper Daniels Font가 만들어졌다. / 사진 출처: Jack Daniel's Tennessee Whiskey(jackdaniels.com)

 

지연 최근에 핫한 아사히 생맥주를 좋아하는데, 패키지나 디자인적인 측면보다 마케팅적으로 브랜드 퍼포먼스 자체가 마음에 든다. 물론 생맥주의 맛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점도 빠질 수 없다.

연준 밀러라는 맥주를 좋아해요. 미군 부대에 납품하는 맥주라 그런지, 서체나 디자인이 전체적으로 미군의 강함이 느껴져요. 그런 분위기가 매력적이고요. 물론 맛도 있는데, 카스의 상위 호환 버전. 풍미가 좀 더 강하고 고소하면서 깔끔해요.

밀러 맥주의 로고를 바탕으로 Miller Lite Font가 만들어졌다. / 사진 출처: Miller Genuine Draft(millergenuinedraft.com)

 

동윤 맥주는 디자인이 정말 천차만별인 것 같아요. 어떤 브랜드가 맛과 이미지에 잘 맞게 디자인했다고 생각하시는지. 제 경험으로는 블랑의 패키지를 보고 사서 마셨을 때, 기대한 맛과 달랐어요. 실제로 향이 되게 강한데, 패키지만 보고 깔끔할 줄 알았죠. 디자인에 따라 이렇게 오인지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크로넨버그 1664 블랑 맥주 / 사진 출처: 하이트진로(hitejinro.com)


하나 기네스 패키지가 묵직한 맛과 잘 어울려요. 로고가 장체인데, 맥주를 쭉쭉 마시는 느낌이 연상되거든요.

연준 로고의 하프도 맥주의 거품이 넘실대는 느낌이고요.

기네스 로고는 Agenda URW Light 폰트를 활용했다. / 사진 출처: Guinness(guinness.com)

 

정은 요즘 로컬 맥주가 많잖아요. 특히 속초 아바이 맥주는 패키지의 정신없는 조악함이 오히려 좋아 보여요. 반면 가평의 크래머리 브루어리는 엄청 심플하고 현대적인데, 기존 맥주에서 보던 패키지 디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죠. 수제 맥주는 디자인이 정말 다양하고, 그래서 재밌고 흥미로워요. 개인적으로 속초처럼 정신없는 게 더 맛있을 것 같고요. 대기업의 머리에서 나온 디자인은 정제된 반면, 로컬은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최근 출시한 개항로 폰트가 개항로 맥주에서 시작되었는데, 맥주 패키지에 개항로 세 글자만 쓰여있고 뭐가 없거든요. 그래도 병이나 서체에서 역사와 풍미가 담겨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좋았어요.

 

개항로 맥주의 로고는 전원공예사 전종원 작가의 글씨로, 최근 윤디자인그룹이 이 글씨를 원도로 개항로 폰트를 제작했다. / 사진 출처: 크래프트루트(craftroot.co.kr), 인천맥주

 

류희 앱솔루트 보드카에 토닉워터나 레몬을 탄 하이볼을 친구들과 종종 만들어 마셔요. 왜 앱솔루트냐고 한다면, 사진을 찍을 때 예쁘다는 게 바로 선택의 기준. 병 자체가 보드카의 상징이잖아요. 앱솔루트의 병은 스웨덴의 오래된 마을에서 발견된 약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해요. 짧은 목에 투명한 병의 독특한 세이프가 소비자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데, 무색 제품의 특징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죠. 코카콜라와 함께 아트보틀로 선정되기도 했고요. 앱솔루트 로고에 사용한 폰트는 Futura Extra Bold Condensed로 모서리 부분에 작은 세리프 장식을 추가하여 커스터마이징했어요. 앱솔루트의 투명함, 단순함, 완벽함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병 디자인에 담았죠.

앱솔루트 보드카의 로고는 Futura Extra Bold Condensed 폰트를 커스터마이징했다. / 사진 출처: Absolut Vodka(absolut.com)

 

동윤 보통 칵테일로 만들어 마시는데, 병 자체의 느낌은 독보적인 존재, 타워, 혼자 그 자체로 짱이야, 이런 이미지예요. 섞어 마시는 술이 아닌 이미지. 이것 말고 또 로고와 잘 어울리는 술 혹은 괴리감이 많은 술이 있을까요?

연준 백세주의 패키지를 보면 젊은 남자가 할아버지를 회초리로 때리고 있어요. 아버지는 백세주를 마셔서 더 이상 나이를 먹지 않았고, 아들은 마시지 않아서 나이를 먹었다는 설화를 담고 있죠. 서체는 안삼열체를 썼는데, 폰트 업계에서는 센세이션한 폰트예요. 서체 자체는 깔끔하고 ‘ㅂ’이나 곁줄기, 내릿점을 궁체로 바꾸면서 예스러운 느낌을 줬어요. 획 대비에서 오는 느낌이 백세주의 이미지, 맛과 정말 잘 어울려요.

백세주의 로고는 안삼열체를 활용했다. / 사진 출처: 백세주(bekseju.com)

 

정은 백세주 과하라고도 있는데, 같은 로고 타입을 썼어요. 포스터도 안삼열체를 변형하여 쓴 것 같고요. 당시 소주나 전통주 브랜드 대부분 캘리그래피를 썼는데, 너무 오랫동안 캘리가 유행하니까 좀 질리지 않았나 싶어요. 이건 폰트의 세련되고 신선한 느낌이 패키지와 술의 맛과도 잘 어울려요.

동윤 최근엔 현대적인 서체로 바뀌는 추세인 것 같아요. 잎새주나 처음처럼, 대선도 그렇고. 참이슬도 간결해졌고요.

정은 처음처럼은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인데요, 존경의 의미가 있는 로고라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우리나라 소주들이 캘리에서 서체화되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아요. 참이슬은 조금씩 변했는데, 갑자기 너무 깔끔해지면 받아들이기 힘들 것 같아요.

처음처럼은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를 로고로 활용했다. / 사진 출처: 롯데칠성음료(company.lottechilsung.co.kr), 하이트진로(hitejinro.com)


하나 참이슬 폰트는 아이유를 닮았는데, (나만 느끼는 건가?) 소주 광고 모델이 이슈화되는 편이라서 그 이미지를 살린 것 같아요.

 


 

술을 좋아해도, 좋아하지 않아도 타입 디자이너는 술을 마시며 글자를 봅니다. 술의 향과 맛, 그리고 멋이 단어나 문장이 아닌 글자의 형태로 표현된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술과 글자를 음미하는 타입 디자이너의 다음 글자도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