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인터넷 신문 매체에서 재미있는 기사를 보았어요. 여러분, 아래 문제를 한번 풀어보세요~
Q. 다음 중 지난 8월 평균 온도가 높았던 도시 두 곳을 고르시오.
①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 ②한국의 대구 ③한국의 전주 ④태국의 방콕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요? 적도 인근의 열대 기후를 보이는 자카르타와 방콕이 아닌, 우리나라의 대구와 전주가 정답이었어요. 헐, 대박! 이럴 수가! 아무리 여름은 뜨거워야 제 맛이라지만 올해는 너무했다 싶을 정도로 너무 더웠죠.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줄 흐르는 여름에는 많은 분들이 해변에서 한바탕 신나게 물놀이를 하거나, 아니면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실내 복합쇼핑몰에서 시원한 휴가를 보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곧 여름도 끝! 입추도 지났겠다~ 처서도 지났겠다~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슬슬 가을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데요. 참 좋은 가을 날씨는 온 몸으로 느껴줘야 하는 법! 신발장에 여름 동안 잠재워둔 튼튼한 운동화를 꺼내 우리 함께 도보여행을 떠나 보자고요~
제가 추천할 도보여행 장소는 대구와 함께 올 8월 평균 온도가 가장 높았다는 전라도 전주입니다. 전라도라고 하면 뭔가 굉장히 먼 곳으로 느껴지지만, 의외로 전주는 서울에서 버스 타고 3시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장소랍니다. 제가 직접 가난한 학생들과 직장인들을 위한 당일치기 전주 여행의 코스 마스터가 되어드릴게요. 오늘 여행의 테마는 ‘타이포그래피 여행’입니다. 전주 곳곳에 숨어있는 개성 있는 글씨들을 하나씩 만나볼 거예요. 말만 들어도 설레지 않나요? 자, 이제부터 떠나볼게요! ^^
서울에서 전주까지, 버스 타고 떠나는 당일치기 여행!
전주까지 어떻게 가느냐! 내 차로 가면 참 편하겠지만, 본인은 뚜벅이족인 관계로 대중교통을 폭풍검색 해봅니다.
* 기차 (용산역에서 출발)
KTX : 차비 30,600원 / 2시간 15분 정도 소요
새마을호 : 차비 25,000원 / 3시간 10분 정도 소요
무궁화호 : 차비 16,800원 / 3시간 30분 정도 소요
* 버스
남부터미널 : 차비 11,600원 / 2시간 40분 정도 소요 / 30분 간격 배차
강남고속터미널 : 차비 우등 18,700원, 일반 12,800원 / 2시간 25분 정도 소요 / 10~20분 간격 배차
상봉터미널 : 차비 20,500원 / 3시간 정도 소요 / 하루 3대 배차
자, 서울에서 전주까지 이동할 수 있는 대중교통 수단은 대략 이러합니다. 선택은 여러분의 몫! 저는 남부터미널에서 일반 버스를 타기로 했어요. 차비가 가장 저렴했기 때문이죠. 버스를 타자마자 2시간 40분이 훌쩍~ 지나갔네요. 전주의 아주 작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주셨어요. 흐흐.
여기서 잠깐! 터미널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발견한 약국의 간판인데요. ‘문화당’이라는 글자는 ‘상상마당체’로, ‘약’이라는 글자는 ‘KT올레체’를 변형해서 썼네요. 기업 고유의 자산인 전용서체를 이런 식으로 오용해서는 아니아니, 아니되옵니다! ㅠㅠ
속상한 마음을 뒤로한 채, 갈 길이 바쁜 관계로 터미널에서 나와 한옥마을로 가는 버스를 탔어요. 한옥마을은 전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이기 때문에, 그곳으로 가는 버스를 아주 쉽게 찾아 탈 수 있답니다. 전주역이든 버스터미널이든 한옥마을까지 버스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어요.
한옥마을 입구에 도착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보이느냐! 바로 그 유명한 ‘전동성당’이랍니다. 영화 ‘약속’을 비롯해 굉장히 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촬영했던 곳이기도 하고, 서울의 명동성당과 함께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호남지역 최초로 세워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이랍니다. 그럼 우선 성당을 한번 구경해볼까요?
캬,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이렇게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평온이 깃드는 기분이 드는데.. 제 눈에 하나 거슬리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성당 안내표지판!
엉엉엉.. 여러분.. 보시면 딱 아시겠죠? 성당 안내표지판에 사용된 서체는 그 유명한 ‘울릉도체’입니다. 성당의 고즈넉한 분위기와는 안 어울려도 너~무 안 어울리는 이 표지판.. 어쩔 건가요.. ㅠㅠ 울릉도체는 만들어진 지도 오래 되었고, 굉장히 다양한 곳에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인기 서체로, 잘 만들어지긴 했지만 전동성당의 안내 표지판에 사용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보여졌습니다. 차라리 단아한 세리프를 가진 명조계열의 서체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색감도 만들어 진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CMYK 중 Yellow 실종! ㅠㅠ
전동성당 맞은 편에는 ‘경기전’이 보입니다. 한적한 자연경관을 품고 있는 곳으로 이 곳 역시 전주하면 빼놓을 수 없죠. 경기전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하는 국내 여행지 1,000곳 안에 꼽히는 곳이랍니다. 저는 이곳을 봄과 여름에만 들러보았는데요. 가을의 경기전 풍경이 특히나 기가 막히다고 하니, 더더욱 꼭 가봐야 하는 곳이겠죠?
경기전 매표소에 서니 수많은 글자들이 보입니다. 가장 크게 보이는 매표소 간판 글씨 중 경기전은 ‘유려체’, 매표소는 직접 쓴 글씨를 사용했네요. 오른쪽 관람료와 관람시간 글씨는 ‘서울남산체’로 쓰였습니다. 서울시 전용서체를 전주시에서 만나게 되다니,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드네요. 아, 참고로 경기전 어른 입장료는 1천 원입니다.
<칼국수가 생각했던 그런 비주얼은 아니죠? 그래도 맛 하나는 최고!>
전동성당과 경기전을 둘러보다 보니 슬슬 배가 고파지네요. 점심식사는 한옥마을에 오면 꼭 가봐야 한다는 ‘베테랑 분식’으로 가볼까 해요. 전주 토박이 친구가 추천한 전통 있는 곳이니 믿으셔도 좋을 것 같네요. (ㅎㅎ) 베테랑 분식은 전동성당과 경기전에서 매우 가까워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컨테이너 박스 같은 삭막한 외관의 분식집. 마당의 넓은 주차장 규모를 보면 ‘무슨 분식집에 이렇게나 넓은 주차장이 있지?!’하는 생각에 깜짝 놀랄지도 몰라요. 베테랑 분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분식집 메뉴, 김밥, 어묵, 라면 등을 파는 곳이 아니라 칼국수 전문점이랍니다. (김밥이 없다고 너무 놀라지는 마세요~) 푸짐한 칼국수 한 그릇에 5천 원! 이 칼국수 한 그릇이 오후 여행을 든든하게 만들어주겠죠?
전주 여행코스 1번지, 한옥마을 둘러보기!
자, 이제 본격적으로 전주 여행의 백미 한옥마을을 돌아다녀볼까요? 한옥마을 지도는 마을 곳곳에 있는 관광센터에서 얻을 수 있고, 그 전에 미리 전주 문화관광 홈페이지(바로 가기)를 통해서도 얻을 수 있어요. 지도를 보면 한옥마을이 무척이나 복잡해 보이지만, 규모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크지는 않고요. 길이 워낙 정비가 잘 되어있어 느리게 걸으며 중간에 길을 잃어도 골목 골목 구경하며 돌아다니는 낭만과 재미가 있답니다.
전동성당에서 시작되는 한옥마을 입구에서 오목대를 가르는 길은 태조로인데요. 이 길 북쪽으로는 전주를 대표하는 작가 최명희를 기리는 최명희 문학관을 비롯, 부채문화권, 전통 한지원, 소리 문화관 등의 볼거리뿐만 아니라 제가 사랑하는 전통술박물관도 있어 우리 전통술을 빚는 과정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답니다. (전주 문화관광 홈페이지에서는 이 북쪽 코스를 ‘한옥마을 단숨에 보는 코스’, ‘골목과 체험이 있는 코스’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태조로 남쪽에는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을 찍었다는 전주향교 등의 문화 유적지뿐만 아니라 작고 아기자기한 공예품을 파는 가게와 예쁜 카페들이 아주 많이 자리잡고 있답니다. (남쪽의 코스를 ‘산책과 사색이 있는 코스’라 하더군요.) 저는 아무래도 서체 디자이너이다 보니, 가게마다 개성 있게 적혀있는 간판의 글씨들에 자꾸 눈이 가더라고요. 한옥마을의 풍경을 해치지 않는 글자는 디지털화된 폰트보다는 아무래도 캘리그래피 글자들이겠죠? 그럼 제가 찍어온 한옥마을의 가게 간판들 한번 구경해보실래요?
예상대로 디지털 폰트보다는 캘리그래피 스타일의 글자로 쓰인 간판들이 압도적으로 많네요. 다양한 표정을 가진 다양한 글자들이 한옥마을을 더 풍성하게 메우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하네요.
전주는 맛의 고장 전라도답게 다양한 먹거리들이 있어요. 어떤 분들은 아예 작정을 하고 ‘전주 식도락 여행’을 떠나오기도 하죠. 한옥마을을 돌아다니다 잠시 앉아 쉬고 싶을 땐 ‘외할머니 솜씨’에 들러 팥빙수 한 그릇 하고 가세요. 주말에는 줄이 입구에서부터 10m씩 서 있다던데, 저는 운이 아주 좋아 바로 들어가볼 수 있었어요.
간판에 쓰인, 일부러 서투르듯 쓴 글씨가 참 정겹지 않나요? 특히 ‘씨’자의 시옷을 세로로 겹친 것이 무척 흥미롭네요. 사진에서도 보이는 옛날 흑임자팥빙수는 꼭 먹어보길 권해드릴게요. 흑임자의 고소함과 달지 않은 인절미의 쫄깃한 식감, 부드러운 우유빙수가 어우러져 환상적인 맛을 낸답니다.
한옥마을 구석구석을 느릿하게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입에 물고 돌아다니다 보면, 어느덧 해가 질 시간이 될 거예요. 그러면 어디를 가야 하느냐! 한옥마을의 전경과 멋진 석양을 볼 수 있는 ‘오목대’로 가야죠!
태조로 끝에서 0.2km만 오르면 오목대에 도착할 수 있어요. 안내표지판에는 윤디자인연구소의 ‘단군체’가 사용되었군요. 종성의 묵직한 느낌이 안정감을 주는 서체랍니다. 오목대는 태조 이성계가 연회를 열던 곳으로 작은 언덕 위에 조그만 정자가 있고, 한옥마을의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에요. 뉘엿뉘엿 지는 해와 고즈넉한 한옥마을의 풍경을 보며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것 같네요.
<황태구이, 대~박!>
‘해는 다 져가는데, 아직 집으로 돌아가기엔 뭔가 아쉽다!’는 분들, 계시죠?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한옥마을 근처의 가맥집에 들러보기로 했습니다. ‘가맥’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가맥은 ‘가게 맥주’의 줄임말로 낮에는 슈퍼, 저녁에는 맥주는 파는 가게를 말해요. 무한 상차림 막걸리집과 함께 전주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라고 합니다. 더운 여름에 가게에서 맥주나 오징어를 사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 한 병 두 병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 저녁에 아예 호프집처럼 맥주는 파는 곳으로 변모한 것이 지금 가맥집의 시초라 할 수 있어요. 제가 찾아간 곳은 전주 가맥집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는 ‘전일갑오’라는 가게인데요. 이곳도 평소에 기다리는 줄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오늘은 제가 운이 아주 좋은가 봐요~ 바로 들어가 전주 공장표 시원한 맥주와 함께 황태구이를 시켰답니다. 아.. 이런.. 어떻게 이런 맛이.. 입안에 신기루처럼 부서지는 이 황태의 정체는 대체 무어란 말입니까! 눈물 날 뻔 했어요. 꼭 드셔보셔야만 알 수 있는 신비로운 맛이니 반드시 들러보시길 바랄게요~
<전주 여행자 대부분이 사온다는 궁극의 초코파이!>
어둠이 깔린 전주를 뒤로한 채, 이제는 서울로 돌아가야겠죠? ‘난 아직도 배가 고프다!’는 분들은 콩나물국밥이나 남부시장 피순대국 한 그릇을, 전주가 너무 좋아서 아무래도 하루 자고 가야겠다는 분들은 한옥마을내의 한옥체험숙박이나 게스트하우스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남부시장 청년몰이나 이목대 자만 벽화마을, 덕진공원, 전주동물원 등 전주의 또 다른 여행 명소를 위해 다음 여행을 기약하시는 분들은 저처럼 PNB풍년제과에 들러 양손 가득 초코파이를 들고 터미널로 향하시면 됩니다. (끝까지 먹부림 ㅎㅎ)
서울에서 3시간이면 충분히 가는 전주. 서울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렇게나 많은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나요? 하늘이 예쁘고 단풍이 멋진, 나들이 떠나기 더없이 좋은 계절 가을! 주말에 하루 시간을 내서 소중한 사람의 손을 꼭 붙잡고 전주에 들러보시길 바랄게요. 이상 ‘전주 타이포그래피 여행’을 가장한 ‘전주 먹부림 여행’이었습니다~ 니냐니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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