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6.

상징주의적 타이포그래피, 허브 루발린(Herb Lubalin)


독일 최대의 스포츠용품 제조 회사 아디다스,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된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소셜커머스 그루폰, 현대자동차그룹 계열의 자동차 전문 광고 회사 이노션, 매혹적이고 섹슈얼한 스타일을 창조하는 돌체 앤 가바나, 미국의 가장 큰 석유 가스 기업 모빌, 국내 최고의 서체 회사 윤디자인연구소. 



여러분, 이 대단한 브랜드들의 로고에서 공통점을 발견하셨나요? 네~ 모두 같은 서체가 사용되었습니다! 동글동글하고 기하학적으로 생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 서체 이름이 무엇이냐, 바로 ‘아방가르드 고딕 (Avant Garde Gothic)’이랍니다. 1970년에 만들어진 이 서체의 디자이너는 ‘허브 루발린(Herb Lubalin)’이란 세계적인 아트디렉터인데요, 오늘 그 허브 루발린에 대해 샅샅이 파헤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트와 상상력 넘치는 루발린식 상징주의



허브 루발린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가장 잘 알려졌던 타이포그래퍼이자 아트디렉터입니다. 그는 일관되게 글자와 이미지 사이의 구분을 없애려는 노력을 기울였는데요, 그러한 노력은 당시에 주도적인 매체로 급부상한 텔레비전과 사진 등의 영상 매체에 대한 대응으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타이포그래피 영역을 개척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이전의 모더니즘이 보여 준 것보다 더욱 다양한 영감을 투영한 새로운 레이아웃의 전형을 보여 주는 현대적 잡지의 시대를 연 편집 디자이너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나이 47살, 1964년 자신의 회사인 허브 루발린 사를 설립한 이후, 그가 보여준 그래픽 스타일은 위트가 있고 상상력이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존재하는 기본형에서 글꼴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활자의 의미적 맥락에 따라 해석을 달리해 전개했고, 이는 ‘루발린식 상징주의(루발린 양식)’가 형성된 맥락이었습니다.  


┃루발린 티슈



루발린의 작업 스타일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는 것으로, 그의 '티슈'가 유명합니다. 그것은 스케치북 크기의 트레이싱지였는데, 루발린의 모든 아이디어와 일의 공정이 그 안에서 계획되고 발주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직원이나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사진작가 등을 옆에 앉혀 두고 함께 디자인하곤 했는데요, 아티스트들은 그의 '즉석 디자인'에 놀라면서 그의 생각에 따라 일을 진행했습니다. 이 티슈 위에서 이루어지는 그의 스케치는 거의 수정 없이 결과물로 완성되어 항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위의 그림을 보세요. 왼쪽이 스케치이고 오른쪽이 결과물인데, 크게 하거나 작게 하거나 곡선 혹은 직선으로 바꾸는 등의 사소한 변경도 거의 없이 바로 결과물로 이어지는 것이 놀랍지 않나요? 이것은 곧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일에 대한 놀라운 집중력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마더 앤 차일드(MOTHER & CHILD)



‘이 로고도 어디서 많이 봤는데?’ 여러분, 지금 그 생각하고 계셨죠? 이 로고 역시 허브 루발린의 작품이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이것은 루발린의 상징주의 타이포그래피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수많은 상을 받고,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 소장된 ‘마더 앤드 차일드 (MOTHER AND CHILD)’ 잡지 로고(1965)입니다. 이 잡지는 불행하게도 출간되지 않았지만, 제호 디자인은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에 불멸의 작품으로 영원히 남았습니다. 여기서 루발린은 ‘MOTHER’의 ‘O’자 안에 ‘AND’를 뜻하는 ‘&’가 태아의 모습으로 ‘아이(CHILD)’를 품고 있는 모습을 활자 이미지로 선보였습니다. 이는 타이포그래피가 단순히 문자적 의미를 전달하는 단순 기능만이 아니라 그 자체가 온전한 ‘시각 이미지’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는 오래된 역사를 재발견해 준 것입니다. (참고로 ‘MOTHER' 서체는 미국의 서체 디자이너 프레데릭 가우디가 1916년에 디자인한 ’Goudy'란 서체입니다. 이 서체 역시 너~무나 유명한 서체랍니다.^^)


편집 디자인 혁명 with Ralph Ginzburg


루발린은 1960년대 중반까지 편집 디자인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게 됩니다. 기성에 반대하는 젊은 비평가와 출판사들이 급성장하는 196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루발린은 본격적으로 잡지 디자인과 인연을 맺게 되죠. 편집자 랄프 긴즈버그(Ralph Ginzburg)에 의해 창간된 <에로스>, <팩트>, <아방가르드>가 그가 관여한 잡지들로, 모두 1960년대의 미국 문화를 다루었어요. 이들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진보적인 시각을 유지하면서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세대들의 증가하는 정치적 관심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긴즈버그는 디자인에서의 모든 권한을 루발린에게 일임했고, 루발린은 자신의 역을 마음껏 발휘했다고 하는데요, 잡지 디자인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이 잡지들 구경해 보실래요?


EROS(1962)





<에로스(EROS)> 제호와 이미지만 보고 벌써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신 분 있으신가요? ^__^ <에로스>는 불행히도 잡지 역사상 가장 짧은 수명의 잡지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랄프 긴즈버그에 의해 1962년 봄에 창간된 이후 총 4호만 발행된 채 같은 해 겨울에 폐간되었습니다. 하지만 <에로스>는 루발린의 디자인 감각과 긴즈버그 특유의 편집으로 여전히 잡지 역사와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는 긴 수명을 자랑하는, 그 어떤 잡지들보다 자주 회자되고 있는 잡지랍니다.


성과 섹스를 주제로 했던 잡지 <에로스>는 외형부터 돋보였습니다. 하드보드로 제본되었고, 13x10inch에 달하는 판형은 잡지라기보다는 단행본의 인상을 주죠? 매호는 평균 90페이지 분량으로 편집되었고, 잡지 표지에는 오로지 잡지 제호와 해당 호에 관련된 이미지가 실렸을 뿐입니다. <에로스>는 분명 성을 주제로 했던 잡지였지만 그 외형 그리고 이를 다루는 방식은 그 어떤 잡지보다도 우아하고 정갈했습니다. 직설적인 성격의 여성 누드 사진을 기대했던 독자들에게 <에로스>는 오히려 따분한 잡지였다고 하는데요, 그만큼 텍스트가 비중을 많이 차지했고 성을 보여주기보다는 그에 관한 담론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긴즈버그는 4호를 발간하면서 연방 외설 관련법으로 유죄를 선고받고 이 잡지는 폐간되었답니다.


fact(1964)



<에로스> 폐간 이후 기소 중이던 긴즈버그와 함께 만든 교양지 <팩트(fact)>는 ‘미국 언론의 소심함과 부패에 대한 대항’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올 만큼 편집 방향이 명확한 사회고발지였습니다. 저예산 잡지였던 <팩트>는 질이 좋지 않은 신문 용지에 인쇄했고, 가끔 두 가지 색으로 표지를 인쇄했습니다. 루발린은 이 책의 포맷을 디자인했고, 거의 모든 책에 걸쳐 자신의 재능을 환하게 펼칠 일러스트레이터들을 직접 선정하고 일을 맡겼다고 합니다. <에로스>나 <아방가르드>와는 달리 긴 본문이 페이지의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미지와 색의 사용과 레이아웃의 변화를 극도로 제한해, 비용은 절약은 물론 사회적 이슈를 부각시키고 지성적 인상을 산출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팩트>는 사회적으로 이슈가 될 만한 테마 하나를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조명하곤 했는데 ‘베트남 전쟁에서의 핵무기 사용 옹호론’으로 악명 높았던 골드워터를 집중 공략해 이내 폐간됩니다. (또 폐간…. ㅠ_ㅠ)


Avant Garde(1968)



‘아방가르드’란 이름은 허브 루발린이 디자인한 서체의 이름이기도 하며, 그가 랄프 긴즈버그와 함께 만든 잡지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아방가르드(Avant Garde)>는 1968에 창간되어 1971년 여름까지 총 14호가 발간되었습니다. <아방가르드>는 제목의 내용이 시사하듯 전위적인 내용으로 가득했습니다. 1960년대 주요 이슈였던 인종주의와 성차별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중심으로 다루는 가운데, 예술가들이 미국 1달러 지폐를 리디자인하여 당시 미국 정부를 풍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고 해요. 성을 소재로 한 피카소의 판화를 처음 공개하고, 표지에 임산부의 모습을 과감하게 싣고, ‘미국인들의 초상(The Portraits of American People)'이란 이름으로 잡지 한 호 전체를 사진집으로 구성하는 등 내용과 디자인에서 진보적이고 전위적이었으며 그 태도는 당차기만 했습니다. 


루발린 덕택에 <에로스>는 아름다우면서도 성적인 매력을 듬뿍 담게 되었고, <아방가르드>는 그 이름을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하게 각인시킬 수 있었습니다. 두 잡지는 모두 거친 목소리를 내는 젊은 문화의 언더그라운드 그래픽과 함께, 당시 주류 디자인 흐름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기능을 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답니다!


U&Ic(1974)



루발린은 1974년 전 세계에 새로운 서체를 공급하는 일을 하기 위해, 친구 아론 번스의 아이디어로 에드워드 론설러(Edward Ronselur)와 함께 ITC(International Typeface Corporation)를 설립합니다. 번스는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서체 디자이너들이, 교묘하게 다시 그려지고 새로 이름 붙여지면서 복제되는 오래된 서체들로 인한 미미한 경제적 보상을 받자고 엄격한 훈련을 받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ITC는 이렇게 약간 수정된 표절 버전을 생산하는 것이 거의 무가치한 일이므로, 이들에 대한 로열티를 무료로 하고 사진 식자기기 제조업체가 ITC의 서체 사용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것과 로열티는 ITC와 서체 디자이너 양자가 나눌 것을 제안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U&lc (Upper & Lower case)>는 그러한 사업 아이템을 비롯하여 ITC에서 개발한 서체의 홍보를 위해 만든, 일종의 타이포그래피 계간지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편집과 디자인을 맡았던 루발린의 일생을 집약해 놓은 결정체에 해당하는 잡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00여 페이지 분량의 타블로이드판 계간지로 시작했는데, 거기에 매년 네 가지의 새로운 서체를 선보였다고 합니다. 1983년에는 전 세계 구독자가 7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는데, 지금도 <U&lc>는 계속 간행되면서 전 세계의 그래픽 디자이너들과 타이포그래피 애호가들에게 새로운 서체를 선보이고, 또 실험과 보수적 성향을 망라하는 그래픽 디자인의 흐름을 상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Avant Garde Gothic(1970)



아방가르드 고딕의 대체 활자쌍(Alternate Character)

현재 흔히 사용되고 있는 아방가르드 고딕


드디어 나왔습니다! 아방가르드 고딕! ^__^ 이것은 <아방가르드> 제호를 위해 1920년대의 기하학적인 산세리프 디자인을 위트 있고 대담하게 표현하는 듯한 산세리프 로고를 디자인한 것인데요, 내지 디자인에도 로고체 글자들을 쓰기 위해 글꼴들을 더 디자인하다 보니 하나의 서체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제호에 표현한 대문자 G와 A의 흥미로운 형태 결합 등을 보여주는 대체 활자쌍(Alternate Characters) 또한 개발하여 다양한 표현의 가능성을 열어 두었습니다. 


서체 아방가르드는 1970년, 허브 루발린이 아론 번즈(Aaron Burns)와 함께 만든 서체 회사 ITC(International Typeface Corporation)을 통해 상업적으로 출시되기 전까지 대문자로만 존재하던 서체였는데요, ITC사와 함께 톰 카네이즈가 소문자와 기타 부호들을 모두 만들어 완성했습니다. 이후 20세기에 가장 성공한 서체로 평가받은 아방가르드체는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면서 수많은 디자이너의 사랑을 받았지만, 서체를 처음 만든 루발린과 그 동료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너무 많은 사람에 의해 무분별하게 사용되었고, 아방가르드를 함께 디자인했던 토니 디 스피그냐는 “아방가르드는 처음에는 몇 군데에만 매우 신중하고 올바르게 사용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세상에서 가장 잘못 사용되는 서체가 되고 말았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윤톡톡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 독일의 유명한 타입 디자이너 에릭 슈피커만(Eric Spiekermann) 역시도 세상의 모든 Avant Garde Gothic을 없애고 싶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거라 생각됩니다.


사실 ‘대체 문자쌍’이 없는 대소문자 아방가르드를, 그것도 보통의 자간으로 썼을 때에는 아방가르드만의 특별함인 긴장감과 위트를 끌어내지 못합니다. 허브 루발린은 글자가 모여 형성되는 단어나 문장의 시각적 인상에 주력했기에 자간이나 행간을 최소한으로 운용했습니다. 이것으로 그의 작업에서는 ‘읽힘’보다 ‘보임’이 한발 앞서는, 강렬한 타이포그래픽 메시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Wow~ 어떠셨나요? 


과연 손꼽히는 아트디렉터이자 타이포그래퍼로 칭송될 만한 분이구나 고개가 끄덕끄덕여지지 않나요? 저도 어렴풋이 알았던 그분의 업적에 대해 공부해가며 놀란 부분이 아주 많습니다. 이 글을 읽고 허브 루발린의 생과 작품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셨다면 앨런 페콜릭 저 <허브 루발린>(비즈앤비즈)과 송성재 저 <디자인 아방가르드 허브 루발린>(디자인하우스) 이 두 책을 강력 추천해드리며 저는 이만 물러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