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18.

'나는 왜 커피를 마시는가', 커피 중독자가 되기까지




출근과 동시에 인스턴트 커피 한 잔, 점심 먹고 더블 샷(전문용어로 도피오 Dopio) 아메리카노 한 잔, 3~4시 사이 졸지 않기 위해서 또 한 잔. 하루에 적어도 세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 건 돈 벌이를 위해 직장 생활이란 걸 시작하면서부터 였다. 커피 때문에 속이 쓰린 줄도 모르고 괜시리 불규칙한 식습관 탓만 하며 아침 밥 대신 빵 쪼가리를 뜯으면서도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먹지 않으려고 노력도 해보았지만 그 중독성을 뿌리치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마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 쓰디쓴 커피를 들이키고 있었던 것이다. 





커피를 처음 마시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부터 였는데, 이유도 참 간단하다. 명분상으로는 카페인이 졸음을 쫓아 공부를 더 오래 할 수 있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론 친구들한테 개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뭔가 있는 척하기 위해서 아메리카노를 입에 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친구들이 사내놈들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진작에 눈치 챘을 것이다.  따지고 보니 나와 커피는 20년 지기 친구다. (담배의 기록과 타이다.) 내 평생 이렇게 오래 곁에 두고 보아 온 친구도 없다. 그러니 어찌 커피 중독자가 아닐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 번도 커피를 왜 마시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더란 말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다지만 평생 커피를 포기 하지 않을 이유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마치 담배를 끊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하듯 커피도 합리화 해보려고 한다. 



커피는 쓰다. 그래서 좋고 그래도 좋다


지금은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받는 것도 참 어색한 일이지만 어릴 땐 왜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를 먹느냐는 질문을 상당히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참나 좋아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그냥 그게 내 입맛이라고 대답했었다. 그런데 사실은 성격 탓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내 성격이 독하다거나 깔끔하다는 건 당연 아니다. 처음과의 인연을 잊지 못하는 것들, 첫눈, 첫사랑, 첫키스, 첫경험처럼 첫커피가 아무 것도 첨가하지 않은 아메리카노였다. 




아메리카노는 쓰다. 그래서 좋다. 커피 전문점마다 쓴 맛의 차이는 있다. 투 샷으로 진한 맛을 내었다면 두말할 것 없이 좋지만 빈(Bean)을 너무 태워서 쓴 맛보다 더 진한 탄 맛을 내는 것도 있는데 고것도 좋다. 그 쓴 맛이 20년 동안 일편단심 좋았다. 



커피와의 대화 : 김혜자 선생님처럼 '그래 이 맛이야'





방금 머신에서 나온 뜨끈한 에스프레소 위엔 크레마(Crema)가 두껍고 또렷하다. 바리스타가 아메리카노를 만들 땐 컵에 뜨거운 물을 먼저 담고 추출한 에스프레소를 조심스럽게 그 위에 붓는다. 그래야 크레마가 조금이라도 덜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커피를 먼저 컵에 담고 뜨거운 물을 부어 만들면 맛이 덜하다. 혀와 입이 예민한 사람들만 그 맛의 차이를 알 정도로 다르다. 이렇게 만들어준 아메리카노를 먹는 순간, 크레마가 입술에 닿고 뒤이어 커피가 입 안에 퍼지는 그 순간, 우리는 '고향의 맛 다시다' CF의 김혜자 선생님처럼 '그래 이 맛이야'라고 습관적으로 튀어나온다.





커피는 만드는 과정을 관찰하는 것만으로 맛을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진정한 커피와의 대화라고 할 수 있다.

글라인더의 호퍼(커피콩을 저장하는 곳) 주변에는 기름이 묻어있지 않아야 한다. 매일 영업이 끝난 후에는 커피를 꺼내 팩에 담아 냉장 보관하고 호퍼는 깨끗이 세척을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글라인더를 작동시켜 커피콩을 그때 그때 갈아서 쓰는지를 확인한다. 미리 갈아둔 커피 가루를 사용한다면 커피의 향이 상당히 날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방금 간 커피 가루를 포터필터의 바스켓 안에 담기 전에 린넨으로 이물질을 제거한다. 그리고 커피가 바스켓 안에 골고루 분포되도록 평평하게 편 후 적당한 압력으로 탬핑(Tamping : 커피를 눌러주는 작업)을 하는데 이때 탬퍼를 잘 살펴보면 수평으로 잘 눌렸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포터필터는 에스프레소 머신 그룹 헤드에 장착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주변에 남아있는 커피가루나 이물질을 제거해준다. 

요즘은 커피 추출 시간을 세팅 해놓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만큼 추출 후엔 작동이 중지 되지만 수동으로 크레마의 상태를 보며 추출 시간을 정하는 바리스타가 있다. 날씨나 습도에 따라 추출 시간이 바뀌기 때문에 난 수동을 선호하는 편이다. 컵에 담을 때에도 컵을 두 세 번 정도 뜨거운 물로 예열시킨 후 담아야 맛이 오래 지속된다.


그래서 커피 전문점에 가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바리스타의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한다. 내가 먹을 커피와 대화할 수 있는 4~5분 남짓의 시간 동안.



커피 사진이 질리지 않는 이유는 분위기 때문이다.





어딜 가나 훈수꾼들은 실력이 출중하지 못하다. 내 사진 실력이 딱 장기판의 훈수꾼 정도다. 혼자서는 잘하지 못하면서 남들이 하는 걸 보면 이렇게 해야 되는데, 저렇게 해야 되는데 한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회사에선 아쉬운 대로 대표 찍사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이것도 참 별일이다. 남들 사진은 찍어도 내 사진은 잘 안 찍는 게 내 사진 철학으로 굳어져 버린 지금, 유일하게 찍는 게 있다면 커피 사진이다. 


실은 커피 사진은 부끄럽다. 사진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찍는 행위 자체가 부끄럽다. 요리조리 커피 잔의 위치를 옮겨가며 뒷배경까지 고려하여 구도를 잡고 최대한 분위기 있게 나오도록 찍는 과정들이 솔직히 낯 간지럽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만 아이폰 카메라로 냉큼 찍어버린다. 


찍는 건 찍는 것이고 찍고 나면 받들어 모시는 게 바로 커피 사진이다. 앞서 말했듯 커피 사진에는 커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카페 조명, 테이블과 벽의 질감, 통유리 밖의 사람들, 신체의 일부 등과 어우러져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진만 보면 치열한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주기 때문에 편안하다. 나와 같은 직장인들이 커피를 마시고 사진을 찍는 것은 순간만이라도 치열함과 단절하여 여유를 갖기 위함일 것이다. 실상은 커피를 들고도 분 단위로 업무를 쪼개어 계산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커피를 들고 있는 모습이 가장 '나' 답더라는 것이다. 커피를 주문하는 모습도, 커피를 기다리는 모습도,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는 모습도,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기 전에 향을 즐기는 모습도, 창 밖을 음미하는 모습도. 커피가 없어도 살겠지만 있어야 더 나 답게 사는 것 같아서, 그래서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