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머릿속이 막 복잡하죠? 힘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자고 일어나니 어떤 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의지와 용기가 불끈 솟아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도무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좌절감과 패배감에 무기력해지기도 하고. 그래서 여행을 가볼까 하면 또 마땅히 갈 데는 없고. 멀리 가기는 귀찮고.
어찌어찌해서 떠난 여행에서 생각이 정리되던가요? 삶의 방향이 명확해지던가요? 아니었을 거예요. 생각 떼러 갔다가 생각 붙여 오지 않으면 다행일걸요? 이럴 땐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잠깐 멈추는 게 방법인 것 같습니다. 잠깐 멈추고 나면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염리동 소금길입니다.
"어, 여기 전에 와본 것 같은데?"
평일 낮 염리동은 조용했습니다. 학교도 교회도 모두 문을 닫았고 길거리도 참 한갓졌습니다.
제가 간 곳은 '염리동'인데, 옛날 살던 난곡동 생각이 났습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빼곡히 들어찬 주택들이 참 많았습니다. 어릴 땐 뭣 모르고 이런 골목이 참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숨을 곳이 많았거든요. 친구들 다섯이 모여 숨바꼭질을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 몰랐었습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고 파출소 신세를 진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염리동 골목에 들어서자마자 예전에 살던 난곡동이 생각난 건 우연이라고 하기엔 참 많이 닮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블로그에서 염리동 소금길을 찾아가는 방법을 아주 간단히 대흥역 2번 출구에서 10분 거리라고만 언급하고 있는데요. 실제로는 생각보다 더 걸어야 소금길이 시작됩니다. 지도 검색 시엔 '숭문고등학교'를 찾으세요. 숭문고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드디어 염리동 소금길이 시작되는 '소금나루'가 나옵니다.
소금나루를 기준으로 양 갈래로 길이 나있는데, 왼쪽 길로 들어서면 됩니다. 엄밀히 말해 여기는 B코스의 시작입니다. 소금길은 두 가지 코스가 있어요. 이대역 5번 출구에서 시작되는 A코스, 바로 여기 소금나루에서 시작되는 B코스입니다. A코스는 약 40분, B코스는 약 25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지 않은 산책하기 딱 좋은 코스입니다. 하지만 오늘 전 천천히 걷기로 했으니 2시간은 족히 걸리겠군요. 이제 본격적으로 잡생각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아스팔트 위 노오란 점선 따라 걷기, 저 언덕 봐..겁나.."
염리동 소금길은 친절합니다. 아스팔트 바닥 위 노란 점선은 미로 같은 골목길에서 길을 잃지 않고 걷기를 즐길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각오는 해야 할 거예요. 저 어마어마한 언덕을 보세요.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산소가 부족할 것 같은 느낌입니다.
평소에 운동이나 좀 할 걸 그랬습니다. 뭐 대단한 인생이라고 일하느라 허송세월하고 있는지, 정말 중요한 게 무언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진작에 시작했으면 건강하기라도 할 텐데. 요즘은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더 큰일이고, 비 오거나 흐리면 허리며 무릎이며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시름시름 앓고 있는 모습을 보며 보약 생각뿐, 운동할 생각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오늘뿐이겠죠? 지나면 나 몰라라 할 겁니다.
"앞에 가는 배달 오토바이, 묻고 싶습니다."
“아니 골목이 구불구불 미로 같은데 번지수만 가지고 어떻게 집을 찾아가세요?”라고 묻고 싶었습니다. 바둑판 위 돌들이 포석을 깔듯 반듯하게 계획된 도시들과는 다르게 주택들이 우후죽순 생겨났잖아요. 골목도 어린아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골목도 허다하다니까요. 그러다가 혼자 이런 생각도 해봤어요. ‘분명, 다른 지역보다 시급이 두 배 일 거야. 여기 배달은 저분들 아니면 못하니까~ 완전 베테랑 분들, 생활의 달인에 나와야 하는 분들, 리스펙’. 전 어쩔 수 없는 물질주의자인가 봅니다.
그런데 이 동네 참 재미있습니다. 번지수를 불러주는 대신 이렇게 주문하는 걸까요? "여기가 32번 가로등 언덕 위로 3번째 집이에요. 나무 벽화 있는 집이요." 꼭 새로운 도시 체계를 갖춘 것 같지 않나요?
번호 달린 가로등, 내 인생에도 좀..
염리동 소금길은 서울형 범죄 예방 디자인 프로젝트 시범사업 첫 번째 대상지로 선정되어 2012년 가을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대에게 염리동은 벽화가 있는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는 동네인지 몰라도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는 총 1.7km 69개 가로등 중 3번 가로등 앞입니다. 고작 숫자가 적힌 69개의 가로등이 우리 이웃의 안전을 지켜줄 수 있을까요? 미리 결론을 말하자면 'YES'입니다. 염리동 소금길의 가로등과 바닥의 노란 점선은 거대한 안전 네트워크 같습니다. 가로등은 동네를 촘촘히 비추고 있고 노란 점선은 안전한 길임을 입증하는 듯 골목을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어디에 떨어뜨려놔도 점선을 따라 걷기만 하면 안전하게 집까지 갈 수 있습니다.
이런 가로등, 내 인생에도 좀 만들어 줄 순 없나요? 노란 점선도 부탁합니다.
추억의 땅따먹기, 난 비석치기를 더 좋아했는데...
땅따먹기입니다. 다소 넓고 평평한 골목 두어 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도 아직 땅따먹기를 하나요? 무한도전이나 중년들의 예능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추억의 놀이인 것 같은데 아직도 한다면 소오름입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보이질 않고 돌멩이도 보이지 않고. 그러면 이건 누굴 위한 그림일까요?
우리는 흙바닥에서 땅따먹기를 했었는데, 선도 발이나 나무 막대기로 그렸었는데, 그래서 선을 밟았는지 아닌지도 목소리 크거나 덩치 크면 이기기도 했었는데. 여기서 하면 얄짤없겠습니다. 그런데 전 비석치기를 더 좋아했었는데요. 다음번엔 비석치기 할 수 있는 그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런 골목, 이런 단독주택 대 환영
반듯반듯한 도시계획이 사람 살기 참 좋죠. 무엇이든 쉽게 찾을 수 있고 길을 잃을 확률도 적고요. 작년 군산에 갔을 때도 같은 걸 느꼈지만 반듯하게 나 있는 도시는 구조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어서 구경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이진 않았습니다.
우리의 전통 도시구조는 방사형입니다. 중간중간 주요 건축물이나 장소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골목이 생기고 집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래서 구경할 맛이 납니다. 동네마다 새로운 문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 이런 골목과 이런 주택들이 좋습니다. 그 건축 양식이 어떻든 집을 먼저 계획하고 골목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골목이 만들어지고 그 골목에 맞추어 지어진 집과 골목이라는 게 매력적입니다.
색 바랜 벽화, 처음 마음 그대로 계속되어야 할 텐데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염리동 소금길은 201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벌써 4년 전이네요. 저 계단에 그려진 벽화, 처음엔 선명했겠죠? 지금은 아니지만요. 지금 한창 유명세를 치르고 있는 벽화마을들이 나중에 견뎌야 할 문제가 바로 재보수입니다. 언젠간 벽화의 색이 바래겠죠. 처음 모습처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만들어질 당시의 마음들이 다시 모여야 하는데 그게 참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퇴색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벽화도 우리도. 오늘부터라도 마음 고쳐먹고 마음에 가로등을 내 손으로 세우든 색을 칠하든 해야겠습니다. 실은 이 다짐이 일주일이라도 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염리동 소금길에서의 잡생각은 여기까지 입니다. 머리 좀 식히셨습니까? 덕분에 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잠시 내려놓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이네요. 고민을 잠시 멈춘 것이지 없어진 것은 아니잖아요. 아, 다시 지루한 일상입니다. 고생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