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2. 15.

[회사원 고난 콩트 시리즈] 을로페셔널('乙'rofessional) 3부 - 산으로 가는 배, 어쨌든 산은 넘어야 한다


▶을로페셔널('乙'rofessional) 1부 - 코털(보러 가기)

▶을로페셔널('乙'rofessional) 2부 - 산으로 가는 배를 멈출 수 없음에 관하여(보러 가기)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픽션입니다. 

2부 ‘산으로 가는 배를 멈출 수 없음에 관하여’로부터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클라이언트 A, B, C, D, E


프로젝트 하나에 담당자 다섯 명. 각종 작업물을 비롯하여 주간 보고, 월간 보고를 5인에게 동시 전송하고, 각각으로부터 돌아오는 피드백에 일일이 응대해야 하는 프로세스. 그러는 와중에 야기된 내부 팀원들 간의 갈등.‘한 건이라도 일을 줄여야 한다!’ 팀장으로서 늘 이 신념을 가졌던 남자는 작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분명히 클라이언트 A가 요청한 미팅 자리, 그러나 매번 B, C, D, E가 우르르 동석하여 각기 다른 일감을 던지고는 사라졌습니다. 1타 쌍피, 1타 3피, 1타 4피의 한 수를 클라이언트들은 능숙하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남자의 마음은 매번 무거웠습니다. 팀원들에게 뭐라 설명하나, 마감은 어떻게 맞추나, •••. 격무에 허우적대는 팀원들에게 구명 튜브는 못 던져줄망정, 이렇듯 격랑만 더해주는 팀장이라니. 헐떡이는 팀원들의 피로한 한숨은 어느덧 클라이언트들이 아닌 팀장에게로 곧장 내뿜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묵직한 숨 냄새를 맡으며 남자는 점차 위축되어 갔습니다. 


천천히, 대단히 위압적으로, 시간은 하루하루 흘렀습니다. 느릿하게 전진하는 육중한 탱크마냥, 날마다 새겨지는 시간의 궤적은 무력한 ‘을’들의 정서를 깔아뭉개고 지나갔습니다. 압도적인 갑의 전력과 대치하며 큰 희생이 뒤따랐지만(팀원 몇 명이 퇴사하고 말았던….), 계약기간 종료일이라는 고지에는 점차 가까워졌습니다. 남자와 팀원들은 곧 종전이 선포될 것이라는 기대에 잔뜩 부푼 상태였습니다. 그동안 빚어졌던 갈등도 상당히 해소되었고, 어색하게나마 웃음꽃도 한 송이씩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 전장에도 봄이 오는가, 가슴 뭉클해지려는 순간도 잠시, 갑 부대가 최후의 일격을 가했으니 그것은 바로•••.



고된 시간은 탱크처럼 육중하게 지나가고….출처: Flickr(바로 가기)



계약기간연장


본래 6개월이었던 과업 수행 기간을 두 달 더 연장하자는 갑의 제안.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을의 응수는 오발이 되고 말았습니다. 과업 수행물, 즉 제작 콘텐츠 단가들을 모두 산출해보니 계약금보다 다소 모자라다는 갑의 논리. 그 차액을 2개월 연장으로 메우자는, 아니, 메우라는 반격이 이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을이 일격에 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담당자들의 업무 요청으로만 콘텐츠 제작이 이루어지는 프로세스였다, 과업 지시서상에 명시된 대로 업무 요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차액이 발생한 것은 수행사 측 과실이 아니다, •••. 정조준의 응대 사격이 이어졌지만 갑은 끄떡없었습니다. 콘텐츠 제작 용역에 배정된 예산과 실제 지출 내역을 일치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갑에게는 있었고, 그것이 바로 갑의 탱크였습니다. 남자가 제아무리 소총을 발사한다 해도, 갑의 기갑을 격파하는 건 무리였습니다. 전력 보강을 해도 모자란 마당이건만, 남자는 최근 막대한 병력 손실마저 겪은 터였습니다. 팀원들 몇몇이 퇴사했고, 심지어 부서장님마저 건강상의 이유로 자리를 비운 상황. 야근과 철야로 만신창이가 된 팀원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남자의 눈앞에 어른거렸습니다. 이제 끝인 줄 알았는데, 다 된 줄 알았는데, 미안하다 전우들이여•••. 


A, B, C, D, E가 A, B, C로 줄어들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알파벳 두 개가 사라졌을 뿐인데, 업무량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두 달 동안의 연장전은 그렇게 계속되는 중입니다. 



산으로 가는 배, 뒤집히지만 않으면 그걸로 됐다


남자는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고 강변 유원지로 나갔습니다. 두 다리로 페달을 힘껏 밟고 젓는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습니다. 호기가 오른 남자는 기어 변속 없이 오르막길을 올라보기로 하고 장딴지에 잔뜩 힘을 주었습니다. 엉덩이를 뒤로 쭉 뺀 채 온몸으로 페달을 밀어가며 느리지만 힘 있게 바퀴를 굴렸습니다. 그런 남자의 옆에서 2인용 자전거 한 대도 함께 오르고 있었습니다.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힘겹게 페달을 밟았습니다. 남자보다 여자 쪽이 자전거를 좀 더 잘 타는 듯 유연하고 리드미컬하게 다리를 움직였고, 지친 듯한 남자는 애인의 리드에 맞춰 페달을 움직였습니다. 남자가 헛페달질을 할 때마다 여자친구는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커플이 탄 자전거도 낑낑대며 기어이 오르막을 다 올라 평지 코스에 안정적으로 진입했습니다. 


어쨌든 가던 길은 가야 한다고, 게다가 그 길이 만약 오르막이라면 더더욱 멈춤 없이 그저 가보는 수밖에는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배는 물 위의 수단이지만, 현실에서 상식적인 일만 일어나는 건 아님을 남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배는 산으로도 갈 수 있고, 별안간 하늘로 비상할 수도 있는 것이죠. 남자는 이제 그 비상식적인 가능성, 혹은 그 비상식성 덕분에 생겨나기도 하는 진취적 용오름에 대한 희망을 간과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산으로 가는 배, 어쨌든 산은 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남자가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인내’, 그림: 아티스트 ‘R’


2개월간의 연장 계약도 어느새 끝나가는 시점. 남자의 뱃머리 너머로 새로운 시간들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저 시간들을 항해하다 보면 또다시 산으로 가는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으로서 도저히 어찌해볼 수 없는 악천후와 맞닥뜨렸을 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뒤집히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라고 남자는 생각합니다. 곱게만 나아갈 수는 없다, 웃을 수만은 없다,반목하고 심술 부리고 짜증 내며 가야 하는 길도 있다, 괜찮다, 뒤집히지만 않는다면, 고지에 도착하여 모든 과정을 다 보상받을 것이다, 보상이 별것 아닐 수도 있다, 난코스를 어쨌든 넘어왔다는 것만으로도 큰 보상이다, •••. 사공이 많아 산으로 가던 배에서 극심한 뱃멀미를 앓고 난 남자가 남기고 싶은 진짜 이야기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