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7. 30.

알고 봐야 하는 것들, 독특한 폰트의 이름 이야기




새하얀 캔버스가 있습니다. 그 위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고, 캔버스 가운데에 어찌 된 일인지 칼자국이 세로로 주욱 나 있습니다. 이 캔버스에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출처: http://www.walkerart.org/



이것은 현대 이탈리아 미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인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의 작품, <공간개념>입니다. 언뜻 보면 누군가가 캔버스에 장난치다가 칼로 잘못 찢어놓은 것 같이 보이지만, 이는 어엿한 미술 작품일 뿐만 아니라 현대 미술 사조에서 한 획을 그은 작품이지요.


폰타나는 캔버스를 칼로 찢어버리는 (어찌 보면) “초”단순한 행위만으로 기존의 미술 개념을 뛰어넘어 새로운 미술사조 ‘공간 주의’를 주창하였습니다. 캔버스는 기존의 평면(2차원) 미술로 대표되는 재료인데 이를 찢어서 평면 위에 공간(3차원)을 생기게 함으로써, 기존 ‘회화는 회화’와 ‘조각은 조각’으로 양분되던 전통적인 개념을 탈피하여 제3의 개념인 ‘공간 주의’를 만든 것이지요.


그저 캔버스에 구멍 난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심오한 개념이 담긴 작품이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배경지식이 없었다면 무신경하게 혹은 가볍게 여기며 지나쳤을 것도, 그 작품에 대해 배경지식을 알게 되면 “아~” 하며 이해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소개해 드릴 두 개의 폰트도 그런 것들인데요. 두 폰트 모두 그저 흔하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산세리프(san serif) 폰트입니다. 생김새로는 그다지 특별하진 않지요. 그러나 이 폰트들이 만들어진 배경지식을 보면 조금은 특별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




Helvetica와 Arial의 묘한 조합, Union


 


첫 번째로 보여드릴 폰트는, 라딤 페슈코(Radim Pesko)가 만든 Union(유니언, 2006)입니다. 이 유니언은 이름 그대로 연합, 융합된 폰트이지요. 무엇과 무엇이 합쳐졌을까요? 이 유니언에는 굉장히 유명한 폰트 두 개가 합쳐져 있습니다. 바로 헬베티카(Helvetica)와 에어리얼(Arial)입니다. 이 조합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조합이면서 가장 말이 많은 조합이지요.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헬베티카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산세리프 폰트인데, 하나의 폰트가 영화의 소재가 될 정도로 디자인사의 굉장히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는 폰트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에어리얼은 이런 헬베티카의 모작(일명 짝퉁)으로 치부되고 있어서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는 다소 기피하는 폰트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컴퓨터 윈도우즈의 기본 폰트이기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많이 사용되고 있는 폰트입니다. 


페슈코는 이 유니언을 설명하면서 “헬베티카는 너무 세련되어 보이고 에어리얼은 너무 저속해 보이는 상황, 또는 그 반대 상황”에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Union is intended for situations where Helvetica seems too sophisticated and Arial too vulgar, or vice versa.”, 라딤 페슈코닷컴의 유니언 폰트 설명 문구) 페슈코가 이 말 많은 조합을 어떻게 섞어 놓았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Union, Arial, Helvetica(위에서부터)



유니언의 ‘t’의 머리 부분(분홍색 원)은 대각선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에어리얼을 닮았고, ‘e’, ‘c’, ‘a’ 등에서 획이 끝나는 부분(분홍색 원)이 대각선으로 처리된 것 또한 에어리얼을 닮았네요. ‘a’나 ‘n’에서 두 획이 맞닿는 부분(노란색 원)이 말쑥하게 처리된 것으로 보아 헬베티카를 닮았고요. :)  


두 개의 서체를 교묘하게 섞어놓은 유니언. 페슈코는 굳이 왜 이 유니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이에 대해 최성민(‘슬기와 민’의 “민”)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 전문 디자이너들이 에어리얼을 깎아내리고 헬베티카를 칭송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페슈코가 유니언을 디자인한 데에는 그처럼 세세한 형태적 차이에 직업적 자부심과 정체성을 투영하는 전문가 집단의 태도를 꼬집으려는 풍자적 의도가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말입니다. (최성민, <1990년대 이후 활자체 디자인에서 차용의 양상과 효과, 한국디자인학회, 2011.>에서 인용)


이 둘의 서체는 생김새 상으로 유사한 부분이 많으면서도 획의 처리방식, 곡선 운용방식 등의 세부적인 요소에서 각자 개성이 드러나는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서체의 맛, 글의 짜임새가 달라지는 것이지요. 에어리얼과 헬베티카를 볼 때 이런 객관적인 생김새의 차이로 두 서체는 닮아있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줍니다. 이로 인해 누군가는 에어리얼이 풍기는 맛을, 또 누군가는 헬베티카가 풍기는 맛을 좋아하겠지요. 이렇게 서체의 생김새에 따라 각자 주관적인 호오(好惡: 좋고 나쁨)가 생기게 됩니다.



Union, Arial, Helvetica의 짜임새(위에서부터)



그런데 에어리얼과 헬베티카는 이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로 인해 호오 반응이 더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에어리얼은 그 태생이 헬베티카를 대체하기 위해 헬베티카의 굵기와 비례를 닮은 “헬베티카의 모작(模作)”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베티카를 오리지널로 생각하고 에어리얼을 오리지널보다 못한 이미테이션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만으로 에어리얼보다 헬베티카를 더 높이 평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지요. 에어리얼이 이런 태생적 이유로 실제 서체의 생김새보다 저평가될 때도 있습니다. 어쩌면 페슈코도 이런 현상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헬베티카와 에어리얼을 함께 섞어 하나의 폰트로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 




10개의 서체를 분석하여 탄생한, Neutral


두 번째 소개해드릴 폰트는 카이 베르나우(Kai Bernau)의 뉴트럴(2005)입니다. 중립, 중성을 뜻하는 뉴트럴은 그 이름에서부터 무언가 중립적인 느낌이 스멀스멀 배어 나옵니다. :) ‘중립적인 서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중립적인 서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까요? 존재한다면 중립적인 서체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할까요? 


베르나우는 바로 이 질문 “중립적인 서체란 무엇인가? (What is a neutral typeface?)”를 시작으로 뉴트럴을 만들었습니다. 겉보기에는 그냥 단순한 산세리프 고딕 서체로 보이지만, 이것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엄청난 과정이 숨겨져 있다는 사실! 



 



그는 흔히 중립적이라고 여겨지는 서체 10개를 선정하여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으로 분석해 나갔습니다. 아마도 위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분석작업에 임했던 것 같아요. 분석대상으로 선정된 서체는 AG Buch, Documenta Sans, Franklin Gothic, Frutiger, Monotype Grotesque, Neue Helvetica, Syntax, The Sans, Trade Gothic, Univers입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본인이 지정한 항목 11가지(글자의 폭, 글자의 길이, 획의 두께, 곡률, 획의 대조, 속공간, 획의 각도 등)로 분석하여 그 결과를 수치화하였고 이 결과의 평균값으로 뉴트럴을 만든 것입니다. 중립적으로 평가받는 서체들이니만큼 그 평균값이 중립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래 표 참고)



뉴트럴을 제작하기 위한 서체 10가지 분석표:

노란색 네모칸 부분이 뉴트럴에 적용될 10개 서체의 평균값(바로 가기)

※ 클릭하면 크게보실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0가지 서체의 ‘e’의 Stroke-end angle(‘e’에서 끝나는 획의 각도, 아래 그림의 THIS 부분)을 모두 구하여 그것의 평균값을 구한 후, 뉴트럴의 ‘e’에 그 각도를 대입하는 거지요. 




베르나우의 작업노트(바로 가기)



그는 폰트를 디자인할 때에도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디자이너 자신의 생각 혹은 취향을 일절 배제한 채 뉴트럴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런 엄청난 과정을 하나의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습니다. 


 

뉴트럴 책자: 소문자 e의 어퍼츄어 사이즈 분석 과정을 담았다.(바로 가기)



참 재미있죠? 단순하게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사연이 깊은 두 개의 서체, 어떠셨나요?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창작물이 각자 나름의 과정을 거쳐서 태어났겠지만, 우리에게 실제 보여는 것이 '결과'인지라, 그 결과물만 보고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결과물만으로 그 수많은 작업과정, 혹은 작가의 의도 등을 다 알 수는 없기에, 잠깐 멈춰 서서 작가의 생각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폰트도 디자이너의 작품이니 폰트를 볼 때도 이것을 어떤 의도로, 그리고 어떤 과정을 거쳐서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을 한 번쯤이라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