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그 사람의 얼굴을 가장 먼저 떠올리곤 합니다. 책을 생각할 때는 어떨까요? 책의 줄거리가 떠오르기도 하고 인상 깊은 등장인물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표지가 먼저 떠오르는 책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책들은 내용과 표지가 뒤섞여 독특한 분위기를 가진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책이 사람이라면, 책의 표지는 사람의 얼굴 또는 겉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한 장소에서 다양한 얼굴의 사람을 만나고, 책상 위 또는 방바닥 위에서 우리는 다양한 얼굴의 책을 만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처럼, 표지 또한 책의 특징을 잘 보여줍니다.

 

표지는 문과 비슷합니다. 표지라는 문을 열고 책의 세상으로 들어가고, 표지라는 문을 덮으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표지가 없는 책을 상상해 본 적이 있나요? 쉽게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습니다. 문이 없는 집을 생각하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죠. 그래도 생각해 본다면 오래된 책의 표지가 떨어져 바로 글자들이 보이는 경우가 떠오릅니다. 발가벗겨진 책입니다. 누군가 방에 달려있는 문을 떼 간 것 같습니다. 뚫려있는 문의 구멍을 통해 책 안의 세상이 보입니다. 어쩌면 그 책의 첫 장이 시간이 지나 표지가 될 수도 있겠죠.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개정판(2010)

이미지 출처: 문학동네 홈페이지


제가 소개할 첫 번째 책은 프랑스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의 장편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2010) 9쪽

 

책의 표지처럼, 글에도 처음 마주치는 글이 있습니다. 이 처음 두 문장에는 소설 전체의 분위기와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주인공(기 롤랑)은 기억을 잃어버렸습니다. 작가는 이런 주인공이 자신의 과거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담한 문체로 쭉 풀어갑니다.

 

“나는 항상 당신이 언젠가 과거를 찾게 되리라고 생각해왔지요.”

“그렇지만 이거 봐요, 기.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군요······.” 앞의 책 13쪽

 

직장동료인 위트는 떠나는 주인공을 향해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고는 작별인사를 하죠. 떠나는 주인공도 자신이 왜 과거를 찾아 나서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주인공은 왜 자신의 과거를 찾으려 하는 것일까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다시 찾는 일이 과연 가치가 있을까요?

 

“거기 강변 도로의 나무들 아래서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무엇 때문에 이미 끊어진 관계들을 다시 맺고 오래전부터 막혀버린 통로를 찾으려 애쓴단 말인가?” 앞의 책 65쪽

 

어쨌든 주인공은 계속 자신의 과거를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자신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어찌나 종잡을 수 없고 어찌나 단편적으로 보였는지······ 몇 개의 조각들, 어떤 것의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내 수사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따지고 보면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인 모양이지요······. 과연 이것이 나의 인생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속에 미끄러져 들어간 어떤 다른 사람의 인생일까요?” 앞의 책 247쪽

 

표지는 이런 책의 내용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표지 기본 레이아웃을 알아봅시다. 표지의 아래 2/3 부분을 검은색으로 덮고, 위의 나머지 1/3 공간에 각 책에 해당하는 이미지를 넣는 것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의 특징입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남은 부분에 파란 사진이 들어갔습니다. 파트릭 모디아노 특유의 담담한 문체, 차갑고 쓸쓸한 이미지가 파랗고 검은 표지와 아주 잘 어울립니다. 밝고 활기찬 내용의 소설이었다면, 표지의 2/3에 해당하는 검은 부분이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을 겁니다. 파란 사진 속의 검은 인물은 오른쪽 기둥 뒤에 살짝 가려져 실루엣만 보입니다. 그리고 몸이, 밝은 출구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두운 안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가 책의 첫 문장과 과거를 찾아 헤매는 주인공을 떠올리게 합니다.문학동네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표지와 내용이 너무 잘 어울려 가끔은 서로가 섞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저의 기억에 남아있습니다.

 

 

민음사의 밀란 쿤데라 전집 중 한 권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2014)

이미지 출처: 민음사 홈페이지

 

두 번째 책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입니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옮김, 민음사, 2014) 9쪽

 

책은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이해하기 쉽고 명확한 사상이 아니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도 전에 머리가 아파지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쿤데라는 자신만의 해석을 통해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말이죠.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앞의 책 9쪽

 

쿤데라의 이야기처럼 우리의 삶이란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라지고 마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무거움과 가벼움 즉, 무게란 아주 중요한 개념으로 책 안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책의 제목에도 ‘가벼움’이 들어가 있죠.

 

“오직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모든 모순 중에서 무거운 것-가벼운 것의 모순이 가장 신비롭고 가장 미묘하다.“ 앞의 책 13쪽

 

쿤데라는 무거움과 가벼움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쁜 것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저 여러 소재를 가지고 물음을 던지며 이야기를 풀어갈 뿐입니다. 그래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생각에 잠기며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심각한 질문들이란 어린아이까지도 제기 할 수 있는 것들뿐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가장 유치한 질문만이 진정 심각한 질문이다. 그것은 대답 없는 질문이다. 대답 없는 질문이란 그 너머로 더 이상 길이 없는 하나의 바리케이드다. 달리 말해 보자. 대답 없는 질문들이란 바로,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표시하고 우리 존재에 경계선을 긋는 행위다.” 앞의 책 226쪽

 

우리가 할 수 있는 진정 심각한 질문은 무엇일까요? 삶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런 질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삶이 뭐지?”, “사람은 왜 살지?”, “나는 왜 살지?”. 우리 대부분이 답을 미루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을 하는 순간, 쿤데라의 말처럼 우리는 우리의 가능성과 존재에 경계선을 긋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반드시 답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답을 한다고 해서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래도 죽기 직전에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대답을 한 번쯤 해보지 않을까요?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은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앞의 책 506쪽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의 1964년작 <중산모를 쓴 남자(Man In A Bowler Hat)>
이미지 출처: WikiArt

 

민음사 밀란 쿤데라 전집의 모든 표지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이 쓰였는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표지 그림은 <중산모를 쓴 남자>입니다. 검정 모자와 정장을 입고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흰 비둘기가 가리고 있습니다. 남자의 옷 색깔과 자세가 무거움을 느끼게 한다면, 비둘기의 색과 자세는 가벼움을 느끼게 합니다. 남자의 얼굴이 비둘기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날아가 버릴 듯한 비둘기의 얼굴을 한 무거운 남자입니다. 책의 중요한 소재인 무거움과 가벼움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마그리트의 그림은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쿤데라의 소설 또한 매력적입니다. 물론 매력적인 두 작품이 합쳐진다고 해서 항상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책은 각각의 매력을 넘어 새로운 매력을 만들어냅니다. 마그리트의 초현실주의적인 그림과 쿤데라의 철학적인 내용이 잘 어울려서 그런 것일까요? 둘 다 명확한 내용의 그림과 글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이유를 알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표지가 글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작품의 2차 가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마그리트 재단이 쿤데라 전집에 대한 사용을 특별히 허가해 주고, 쿤데라 역시 마그리트 작품이 사용된 자신의 전집 표지 시안을 보고 “이전에 본 적 없을 정도로 훌륭하고 아름답다”라고 격찬한 것을 보면 말이죠.(관련 글: 밀란 쿤데라 전집 세트 편집자 리뷰)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같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또한 하나의 이미지로 저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의 기억에는 어떤 책의 이미지가 남아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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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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