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10. 28.

‘스냅백’은 어떻게 대세 아이템이 됐을까?

이미지 출처: ThisIsMotivation.com (바로 가기)

 

 

어린 시절에 야구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제가 응원하던 팀은 OB베어스였죠. 이 팀의 로고가 들어간 야구 모자와 점퍼를 즐겨 입고 다녔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한 가지는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제 OB베어스 모자의 사이즈 조절용 똑딱이를 바꿔 끼우던 순간입니다. 한 살 한 살 성장하면서 제 머리 사이즈도 커졌나 봅니다. 그렇게 머리가 커진 어느 날, OB베어스가 두산베어스로 바뀌었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전히 제 옷장 안의 모자와 점퍼는 OB로 남아 있지만 말입니다.

 

얼마 전 스냅백이라는 것을 선물받았습니다. 똑딱이, 즉 스냅(snap)이 모자 뒷부분(back)에 있다고 해서 ‘스냅백(snapback)’이라 불린다고 들었습니다. “응? 내 OB베어스 모자도 그러면 스냅백이겠네?” 하며 반가워 했죠. 스냅백이라는 용어는 요 몇 년 사이 처음 들었는데, 알고 보면 꽤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존재해왔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냅백의 원형이라 할 만한 모자가 탄생한 시기는 1860년대라고 합니다. 월스트리트의 잘나가던은행원 알렉산더 카트라이트(Alexander Cartwright)가 지금의 스냅백과 비슷한 형태의 야구 모자를 최초로 제작했습니다. 당시에도 팀매치 방식의 야구 경기가 열렸는데, 알렉산더는 ‘뉴욕 니커보커스(New York Knickerbockers)’ 팀의 구단주이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프로야구 팀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845년 공식 야구 룰을 제정했고 1849년에는 역시 최초로 팀 유니폼을 맞춰 입었다고 합니다.

 

뉴욕 니커보커스 이후 야구 팀들은 저마다 유니폼을 갖췄는데, 1954년까지만 해도 모자(헤드기어, headgear)만은 선수들 각자 취향대로 골라 쓸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자 역시 유니폼 세트에 포함되었죠.

 

 


뉴욕 니커보커스 팀원들(앞줄 맨 왼쪽과 오른쪽 남성들의 손에 야구 모자가 들려 있네요), 출처: MLB BLOG (바로 가기)

 

 

야구 모자 상품화의 조상격 ‘아메리칸 니들’

 

1918년 설립되어 지금껏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미국의 ‘아메리칸 니들(American Needle)’은 모자(headwear) 제조 회사입니다. 재봉이 가능한 바늘(sewing needles)을 수입해 오면서, 바느질로 완성한 품질 좋은 모자 상품을 선보이며 성공을 거두었죠.

 

 


1920년대 모자 제조 업계를 선두한 아메리칸 니들, 출처: American Needle (바로 가기)

 

 

1946년 이 회사는 궁극의 사업 수완을 발휘했는데요. 각 프로야구 팀 로고가 들어간 모자 상품군을 내놓은 것이죠. 이 모자는 선수와 팬 모두에게 판매되었습니다. 앞서 설명해드렸듯, 1954년 이후부터는 선수들의 모자도 유니폼의 일부로 정해짐에 따라 아메리칸 니들은 실로 대박을 터뜨리게 됩니다. 시카고 컵스(Chicago Cubs) 팀과의 협업을 기점으로 모든 메이저리그(MLB) 팀의 모자를 제작 및 공급했고, 일반 소비자들의 시장에도 차례차례 내놓았습니다. 야구 모자 상품화의 시작이라 할 수 있죠. 이후 이런 트렌드는 야구계를 넘어 풋볼(NFL), 농구(NBA), 하키(NHL) 등 다양한 스포츠 영역으로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아메리칸 니들의 초기 MLB 모자들, 출처: American Needle (바로 가기)

 

 


아메리칸 니들의 스냅백 라인 400시리즈, 출처: American Needle (바로 가기)

 

 

시장에 상품이 퍼지면, 그리고 성공하면, 그 상품을 매개로 한 새로운 응용과 트렌드가 생성되기 마련이죠. 가령, 휴대폰이라는 오리지널 제품이 시장에 등장하면, 휴대폰 케이스, 휴대폰 스티커, 휴대폰 홀더 등등이 생겨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스냅백 방식의 야구 모자는 1990년대 들어 도심의 흔한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는 이른바 스냅백 스웩(snapback swag) 스타일이 물꼬를 튼 진원지라고 합니다. 특히 N.W.A, Mobb Deep, Snoop, 2Pac 같은 실력파 힙합 뮤지션들이 스냅백을 자주 착용하면서 팬덤 사이에서 자유, 당당함, 비타협, 자기애 등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승격한 듯합니다. 스냅백이 갖는 이런 고유의 이미지는 지금도 계속 남아 있죠.

 

 


N.W.A, 출처: Biography.com (바로 가기)

 

 


2Pac, 출처: ThisIsMotivation.com (바로 가기)

 

 


브랜드별 스냅백, 모양은 같지만 철학은 다르다

 

우연히 선물받은 스냅백에서 어린 시절 OB베어스의 추억이 피어 올랐고, 스냅백의 전신이 야구 모자였다는 걸 알게 되고, 그러다 보니 약간의 역사도 궁금해져 이 글을 써봤습니다. 앞서 언급한 아메리칸 니들 외에도 스냅백 브랜드들은 많습니다. 왠지 스냅백이라 하면 챙(brim)이 빳빳한 모자를 떠올렸는데, 실은 챙과는 별 관계가 없다는 걸 이 글을 쓰면서 알았습니다. 스냅백이라는 명칭 그대로 ‘스냅이 뒤에 달린 모자’이니까요. 실제로 챙을 살짝 구부려 착용하는 예도 있고요. 평평한 챙(flat brim)에 그림을 그려 착용자 본인만의 개성을 표현하기도 하고요. ‘스냅백’이라는 형태는 같을지 몰라도, 브랜드마다 사람마다 철학은 다 다른가 봅니다. 유명한 해외 스냅백 메이커들의 브랜딩 전략을 간략히 살펴보고, 스냅백 좀 쓸 줄 아는 듯한 몇몇 분들의 비주얼도 감상해보겠습니다.

 


클래식의 품위, 아메리칸 니들

 

 

 

 

 


출처: American Needle (바로 가기)

 

 

· 홈페이지: http://shop.americanneedle.com/
· 브랜딩 전략: 올해로 설립 97년째인 모자 전문 제작사인 만큼, 화려한 프로모션보다는 전통성에 기반한 점잖은 홍보를 펼치는 편입니다. MLB 메인 제조 기업이었기에 기본 인지도가 높기도 하죠. 초창기와는 달리 수공예 봉제 공정에서 지금은 기계식으로 변화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Needle’이라는 키워드를 기업의 핵심 가치로 부각하며 장인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제품군은 baseball, hockey, tennis, golf 등 주로 스포츠 테마로 나뉩니다. 홈페이지 메뉴 중 ‘Bespoke’에 들어가면 테일러드 수트와 같은 맞춤형 모자를 제작 주문할 수도 있습니다.

 


소비자를 크리에이터로 만들다, 뉴에라(New Era)

 

 

 

 

 


출처: New Era (바로 가기)

 

 

· 홈페이지: www.neweracap.com/
· 브랜딩 전략: 뉴에라는 아메리칸 니들보다 2년 늦은 1920년 설립된 모자 전문 제작사입니다. 라이벌이라 할 만하겠지만, 상품군을 보면 두 회사의 색채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클래식 디자인과 전통성을 부각하는 아메리칸 니들과는 달리, 뉴에라는 확연히 어반 트렌드(urban trend) 쪽입니다.

 

 

온라인 커스텀 서비스를 제공하는 뉴에라, 출처: NewEraByYou.com (바로 가기)

 

 

뉴에라의 판매 전략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이 ‘New Era by You’입니다. “You Can’t Buy Originality. You Have to Create It.”이라는 슬로건이 모든 걸 말해주는데요. 아무 그래픽 없는 기본형 스냅백 제품을 착용자가 온라인을 통해 원하는 대로 커스터마이징을 할 수 있는 구매 방식입니다. 패널(panels, 스냅백 바디를 이루는 면의 조각), 스레드(thread, 스냅백 바디 상단의 재봉선), 아일렛(eyelets, 스냅백 바디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들), 스냅 등의 색상 조절이 가능하고, 로고 디자인도 바꿀 수 있습니다. 착용자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한 단 하나밖에 없는 모자가 완성되는 셈이죠. 뉴에라는 이런 전략을 통해 스냅백 특유의 자유분방함과 주체적인 자기 표현을 보다 효과적으로 더하고 있습니다. 또한, 착용자(소비자) 모두를 ‘크리에이터’로 만들어줌으로써 ‘뉴에라’라는 브랜드를 통해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들죠.

 

 

착용하는 순간 ‘내’가 된다, 왓이짓(WHATEZIT)

 

 

 

 


출처: WHATEZIT (바로 가기)

 

· 홈페이지: http://whatezitny.com / 한국 홈페이지: http://whatezit.co.kr
· 브랜딩 전략: 브랜드 이름이 독특합니다. 미국판 홈페이지에는 WHATEZIT과 함께 WHATEVER라는 낱말도 함께 적혀 있는데요. ‘이게 뭐지? 뭐면 어때!’의 정신이랄까요. 왓이짓이 표방하는 캐릭터가 검은 양, 블랙쉽(Blacksheep)입니다. 흰 양떼 가운데 섞인 검은 양입니다. 사전에는 ‘골칫덩이’로 풀이되어 있기도 합니다. 왓이짓의 블랙쉽은,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다움을 숨기지 말고 당당히 표출하자는 뜻을 담은 상징이죠. 이를테면 서태지, 신해철, 지드래곤 같은 뮤지션들은 기성 트렌드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기보다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고집하며 독자적인 음악 색채를 완성했습니다. 이들 역시 블랙쉽이라 할 수 있겠죠.

 

 


왓이짓의 캐릭터 ‘블랙쉽’, 출처: WHATEZIT (바로 가기)

 


왓이짓은 뉴욕의 디자이너들이 결성한 프로젝트 그룹에서 처음 시작한 브랜드라고 해요. 장식이 없는 간결한 디자인이 특징입니다. 검거나 흰 바탕에 WHATEZIT, 이 단어를 줄인 We, 혹은 커다란 블랙쉽 캐릭터가 각인된 제품들이 주를 이룹니다. 마치 젊은이들에게 블랙쉽이 되어보라는 일종의 캠페인 내지는 소리 없는 혁명처럼 다가오기도 합니다.

 

왓이짓의 차별화된 브랜딩 전략은 디자인과 같은 시각적 요소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브랜드 철학을 지속적으로 홍보한다는 것입니다. 상품성 못지않게 브랜드 자체가 내포하는 ‘의미’를 공유하겠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유명 스타들을 공식 모델로 앞세운 롤모델 전략을 지양하고, 너도 나도 ‘We’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는 측면에서 왓이짓은 여타 의류 브랜드들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비교적 최근 런칭한 브랜드인 만큼, 비주얼보다는 브랜딩 철학을 우선 홍보하여 입지를 다지겠다는 전략이겠죠. 국내 시장에서는 모험이라 할 수 있겠지만, 이 점이 오히려 왓이짓의 브랜드 품격을 높여주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로고타입 변화로 브랜딩 각인력 높이기, 도프(Dope)

 

 

 


출처: DOPE (바로 가기)

 

· 홈페이지: https://www.dope.com/collections/headwear
· 브랜딩 전략: 스냅백 애호가들에게 도프(Dope)는 익숙한 브랜드일 겁니다. 아메리칸 어페럴(American Apparel)처럼 다종다양한 의류 상품들을 제조하고 판매하는 회사입니다. 모자 전문 제조사는 아니지만 도프의 스냅백들은 브랜드 각인력이 확실한데요. 앞서 소개한 왓이짓만큼이나 도프 역시 이런저런 요소를 걷어낸 비교적 간결한 디자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다채로운 로고 문양 덕분입니다. 하나의 확정된 로고 디자인을 활용하는 다른 브랜드들과 달리, 도프는 제품마다 각기 차별화된 로고 형태를 선보이고 있는데요. 세련된 레터링이 등장하는가 하면, 낙서를 해놓은 듯 장난기 다분한 드로잉이 출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틀에 얽매이지 않는 로고타입 변화는 자연스럽게 도프라는 브랜드를 입체적으로 표현해줍니다. 어느 한 이미지에만 고정되지 않겠다는, 즉 어떤 성향의 소비자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다는 브랜드 철학이 형성되는 것이죠. 이런 전략은 당연히 브랜드 확산과 장악력을 제고시켜줄 겁니다.

 


스냅백 고수들의 튜토리얼

 

커스텀 스냅백의 달인들이 친절하게도 적잖게 노하우를 공유해놓았습니다.
몇 가지를 함께 감상해보겠습니다.

 

 

<CUSTOM SNAPBACKS WITH BRIM SKINS>

스냅백 챙 부분에 다양한 스킨을 덧씌우는 방법입니다. 출처: 유튜브 (바로 가기)


 

<How to Customize a Snapback / Strapback>

커스터마이징 장비들이 대단하네요. 저는 그냥 하나 새로 살래요…. 출처: 유튜브 (바로 가기)


 

<WHATeZIT Hand-drawn Custom>

스냅백 바디에 이렇게 드로잉도 가능하군요. 국내 아티스트가 취미로 작업해본 것이라고 합니다.

(취미라기엔 완성도가… ㄷㄷ), 출처: 왓이짓 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