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사람들

[인터뷰 시리즈: 글자-마음 보기집] #6 포스트 코로나를 고민하는 10년차 폰트 디자이너 이해린

Yoondesign M 2022. 6. 24. 09:00

 

[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여섯 번째 인터뷰이

포스트 코로나를 고민하는 10년차 폰트 디자이너 이해린

 

 

 #10년차_폰트디자이너 #TV프로_자막에도_집착하는_직업병 

 

“고등학교 선생님이 권한 직업, 폰트 디자이너” 

 저는 디자인 고등학교에서 시각 디자인을 전공하고 졸업과 함께 바로 취업한 케이스인데요. 학교에 취업을 담당하시는 선생님께서 복도를 지나가던 저를 붙잡고 “폰트 디자인 해볼 생각 있니?”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보면 그 선생님의 권유로 덕분에 폰트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된 거죠.

 

 제가 학교에서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거든요. 그럼에도 선생님께서 저를 기억해 주셨다는 점에서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 저는 매일같이 휴대폰에 적용된 폰트를 바꿀 만큼 폰트에 관심이 많았어요. 하지만 직업으로 삼아볼 생각은 못하고 있었습니다. 폰트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낯설기도 했고,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지레 겁도 났던 것 같아요. 그때는 ‘폰트 디자이너’가 디자인 전공자들에게도 생소한 직업이었거든요.

 

 어느새 10년차 폰트 디자이너가 되어 있는 지금, 고등학생 이해린을 복도에서 붙잡아준 그 선생님께 새삼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선생님의 눈썰미와 판단력으로 제 적성을 빨리 찾았으니까요.

 

“세 시간 출퇴근러의 하루를 채우는 세 가지.”

 첫 번째는 커피! 여느 직장인들과 똑같이 출근 후엔 커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카페인 수혈이 꼭 필요하거든요. 여기서 잠깐 ‘깨알 회사 자랑’ 한번 해볼게요. 윤디자인그룹의 복지 혜택 중 하나가, 원두 커피 무한·무상 제공입니다. 카페인이 필요할 때 부담 없이 커피를 마실 수 있어요.(웃음)

 

 두 번째는 작업! 커피를 다 마시고 나서는 전날 제가 한 작업을 간단히 훑어봅니다. 어제 내가 몇 글자나 만들었는지, 오늘은 몇 글자를 그려야 하는지를 간단히 정리해보는 거죠. 오늘 하루의 할당량을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미랄까요?

 

 세 번째는 맥주! 작업 할당량을 다 채우면 당연히 퇴근을 합니다. 집까지 왕복 세 시간이 걸리거든요. 저는 장시간 출퇴근러라서 평일 약속은 잘 안 잡는 편이에요. 다음날 무사히 출근하기 위해···. 귀가하면 남편과 그날 있었던 일들을 시시콜콜 얘기하면서 맥주 한 잔을 하는데요. 그러면 하루의 피로가 싹 날아갑니다. 너무 뻔한 루틴이죠?(웃음)

 

“TV에서 ‘내 폰트’가 쓰인 자막을 보았을 때의 흔한 반응.”

 음.. 저는 제가 만든 디자인을 좋게 보지 못해요. 제 디자인에 대해 굉장히 엄격하거든요. 물론 제가 만든 폰트가 어디선가 쓰이고 있는 걸 보면 뿌듯하죠. 하지만 이런 좋은 기분은 아주 잠깐이더라고요.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TV 프로그램을 보는데 제 폰트가 쓰인 자막이 나오는 거예요. 그때부터 프로그램 자체에 집중이 안 됐어요. 마치 내 작업을 검수하듯이 ‘단점’을 찾게 되더라고요. 저 글자는 왜 저렇게 만들었지?, 공간감하고 균형감은 왜 저렇지? 하면서요.

 

 이런 엄격함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요. 다음에 글자를 만들거나 디자인할 때 똑같은 실수를 안 하도록 방지해주거든요. 그러다 어느 순간 내가 발전되었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되기도 해요. 물론 깨닫고 나면 또 엄격해지지만요.(웃음)

 

“그럼에도 거부할 수 없는 글자의 매력”

 글자만이 가진 매력이 분명히 있어요. 이건 경험해 본 사람만 알 것 같긴 한데요···. 한글의 많은 글자를 만드는 긴 호흡이 주는 지루함, 그 끝에 다다르게 되면 다른 어떤 작업들보다 달콤함을 맛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만든 글자가 한 곳만이 아니라 다양한 색을 가진 곳에서 두루 쓰이니까, 마치 누군가가 준비해둔 ‘깜짝 이벤트’처럼 언제 어디선가 저를 기분 좋게 해준다는 점도 신선하고요.

 

 

 #기억에_남는_프로젝트 

 

“가장 재미있었던 프로젝트 [덕온공주옛체].”

 윤디자인그룹에 입사했을 때, 조선시대 덕온공주의 필체를 그대로 복원해 서체화하는 프로젝트가 진행 중이어요. 여기에 바로 투입됐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는 세로쓰기용 폰트에서 연결글자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붓글씨로 글을 적을 때 나타나는 흘림을 폰트에서도 표현이 가능하도록 만드는 작업이었어요. 연결글자 간의 패턴을 분석한 뒤 오픈타입 피처(opentype feature) 기능을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오픈타입 피처에 대한 관심이 컸던 때라 굉장히 흥미롭게 작업에 임했던 것 같아요.

 

 직접 오픈타입 피처 기능을 이용해서 폰트를 만들어 본 적이 없기도 했었고, 기초적인 부분만 얕은 지식으로 알고 있어서 공부가 필요했었는데요. 온통 영어로 된 정보들이라 애를 먹긴 했어요.(웃음) 앞으로 기회가 주어진다면 오픈타입 피처에 대해서 좀더 깊고 폭넓게 배워보고 실전에 활용해보고 싶어요.

  ➲ [덕온공주옛체] 보기

 

덕온공주가 아버지 순조의 『자경전기(慈慶殿記)』를 한글로 옮긴 친필 글씨와 이를 복원한 [덕온공주옛체], 2021

― 덕온공주의 『자경전기』는 국립한글박물관 소장품입니다 ➲ 참고 자료

 

[덕온공주옛체]의 연결글자

 

위  이미지들은

국립한글박물관 한글글꼴사전에 게재된 「서체 활용 안내서」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처음 콘셉트를 끝까지 유지했던 [한림명조체].”

 저는 첫 콘셉트를 끝까지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첫 콘셉트로 시안을 10~15자 정도 만들고, 그 후에 사용 빈도가 높은 글자 200~300자를 파생합니다. 10~15자 시안에 표현한 디자인 모티프(motif)를 확장시켜서 200~300자 규모로 다양하게 적용을 해보는 작업이에요. 이 과정이 정말 중요해요. 콘셉트가 여러 글자에서 조화롭게 적용되도록 조정하고, 디자인 특징의 강약을 조절해주는 단계니까요. 이 과정을 잘 거치고 나면 폰트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뚜렷해집니다. 2,350자 또는 11,172자를 다 파생해도 흐트러지지 않고 콘셉트를 잘 유지할 수 있게 되죠.

 

 마침 떠오르는 최근 프로젝트가 있네요. 제가 개발을 맡았던 한림대학교 의료원 전용서체인 [한림명조체]예요. 한림대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일송학원’ 설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서체였고, 한림대 의료원의 두 번째 전용서체였어요. 타 명조체와 구분되는 특색 있는 명조체, 라는 것이 주안점이었습니다. 강약 조절이 쉽지 않았는데, 처음 기획 의도와 디자인 모티프를 계속 되새기면서 파생을 해 나갔어요. 최초에 의도한 대로 결과물이 나온 프로젝트라 꼭 언급을 하고 싶습니다.

  [한림명조체] 보기

 

한림대학교 의료원 전용서체 [한림명조체], 2022
― 출처: 한림대학교 의료원 유튜브 ―

 

[한림명조체]가 적용된 한림대학교 의료원의 콘텐츠들

 

 

 #직업으로서의_폰트디자이너 #포스트코로나를_고민하며 

 

“글자의 옷을 짓는 사람.”

 글자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상상도 못할 만큼 글자는 우리 생활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어요. 다양한 매체에서 다양한 용도로 만날 수 있죠. 이렇게 당연하게 쓰이는 수많은 글자도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그 내용을 분명하게 전달할 수 있고, 사회의 디자인적 아름다움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폰트 디자이너는 이러한 글자의 옷을 짓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업으로서의 폰트 디자이너? 이 두 가지는 반드시 감당하라!”

 제 경험상 폰트 디자이너로서 살아갈 때 가장 힘든 점은 두 가지 정도로 추려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 타 디자인 분야와는 다르게 컬러를 다룰 수 없고 오로지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화면과 인쇄물을 봐야 한다는 점이에요. 검은색 글자, 하얀색 여백 안에 여러 가지 특색을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때가 많습니다.(웃음)

 

 두 번째는 작업의 긴 호흡. 한글은 적게는 2,350자, 많게는 11,172자를 만들어야 하는 건 많은 분들이 아실 거예요. 신규 프로젝트의 시안 작업을 할 때는 새로운 주제에 흥미를 느끼면서 리프레시 되기도 하지만, 시안이 확정되고 그다음 단계인 글자 파생 작업에 돌입하면··· 엉덩이를 가만히 붙이고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딥’한 지루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폰트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한 게 ‘무거운 엉덩이’라는 말을 여기에 붙이면 좋을 것 같네요.(웃음)

 

 그렇지만 제 노력이 담긴 서체가 완성되어 다양한 디자인 매체에서 다양한 색의 옷을 입고 사용되는 것을 보면 ‘부모님이 나를 보실 때 이런 느낌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데요. 잘 쓰여줘서 대견스럽고 자랑스럽다··· 뭐 그런 마음이 아닐까 싶어요.(웃음)

 

“클라이언트를 존중한다는 것의 의미.”

 클라이언트의 선택과 작업자의 선호가 엇갈릴 때가 있죠. 내심 A안이었으면 했던 작업이 클라이언트의 간택을 받지 못하고 B안 폴더에 보관될 때, 마음이 조금 쓰리긴 합니다. 어떤 디자인 분야든 이런 일들이 있을 것 같아요.

 

 불과 얼마 전에도 대립의 순간이 있었어요. 대립이라고 표현하면 굉장히 무거운 분위기 같은데, 실은 그렇지는 않았어요. 브랜드 담당자 님께서 여러 시안 중에 무얼 선택할지 고민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에게 폰트 전문가로서 선택을 해달라고 맡기셔서, 제가 미는(?) 시안을 자신 있게 골랐습니다. 그런데, 최종 선정 때 전혀 다른 시안을 선택하셨더라고요.(웃음) 

 

 자신의 브랜드에 무엇이 어울릴지 가장 잘 아는 분들은 브랜드 담당자님들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 선호와 엇갈리는 결정이 있더라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입니다.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의 선택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디자인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내 생각을 ‘정답’으로 강요할 수는 없는 거죠.

 

“코로나19 이후 바뀐 ‘트렌드’에 대한 생각.”

 예전에는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서체, 어디서도 보지 못한 서체를 만들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참 많이도 했던 것 같아요. 폰트 시장의 트렌드는 급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 트렌드를 놓치지 않으려고 또는 트렌드를 직접 만들어 주도해 나가기 위해 노력했던 거죠.

 

 그런데 코로나19 시국을 거치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좀 전에 말했듯이 예전에는 트렌드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흐름을 어떻게 하면 잘 반영할 수 있을까’를 더 고민합니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삶이 많이 변했잖아요? 코로나19 때문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일지도 모르지만, 인쇄 매체보다는 디지털 매체와 더 가까이 살고 있는 시대로 점차 변화하고 있죠. 디지털 매체에서 어떻게 하면 시각적으로 잘 표현이 되고 잘 보이는 폰트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점을 숙제로 여기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시국을 거치면서 ‘새로움’에 대한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트렌드 자체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트렌드가 왜 지금 태동한 것인지,
그 트렌드를 받아들인 현재의 시대적 흐름을
디자인으로 어떻게 반영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어요.

― 폰트 디자이너 이해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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