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사람들

[인터뷰 시리즈: 글자-마음 보기집] #1 ‘덕온공주체’ 디자이너 이가희

Yoondesign M 2022. 1. 14. 09:16

 

[꼴] 겉으로 보이는 사물의 모양

[결] 성품의 바탕이나 상태

 

글자(typeface)는 주로 ‘꼴’에 관하여 이야기됩니다. 글자가 품평의 대상이 될 때 그 근거는 대개 꼴의 완성도입니다. 인격이 피지컬과 멘탈의 총합으로 구성되듯, 어쩌면 글자도 그러한 겉과 안의 본연한 아름다움이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사람의 신체와 글자꼴(글자의 모양)이 조응한다면, 사람의 멘탈에 해당하는 글자의 요소는 무얼까, 또 상상하다가 이렇게 답을 내리기로 합니다. 글자를 그리는 디자이너의 태도.

 

그러고 보니, 그동안 『윤디자인 M』은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의 산출물에만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글자의 꼴, 그래픽의 꼴, 타이포그래피의 꼴 등등. 문득 이러한 디자인 작업들의 좀더 깊은 측면을 바라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글자-마음 보기집]이라는 이름은 ‘글자 보기집(type specimen)’에 ‘마음’을 살짝 얹은 제목입니다. 글자의 [꼴]에만 향해 있던 시선을 글자 디자이너의 [결]로 확장해본다는 의미입니다. 윤디자인그룹 디자이너들이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하고, 그와 함께 그들의 ‘마음’도 펼쳐보려 합니다.

 

시리즈명이 [글자-마음 보기집]이고 ‘디자이너 인터뷰’를 표방하지만, 디자인 직종 외의 직원들도 이 시리즈에 (자주는 아니겠지만) 등장할 예정입니다. 윤디자인그룹이 글자를 근간으로 하는 기업인 만큼, 디자이너가 아닌 많은 직원들도 결국은 글자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각자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과 결 또한 [글자-마음 보기집]에 수록되어야겠지요.

 

윤디자인그룹 직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구나, 기계적으로 글자를 생산하는 인적자원이 아니라 저마다의 사고와 방향을 지닌 인격체들이구나, 하고 느껴주신다면 좋겠습니다.

 

 


 

 

[글자-마음 보기집] 첫 번째 인터뷰이

국립한글박물관 ‘덕온공주체’ 담당 디자이너 이가희

 

 

 날마다 작업하듯 자기소개를 해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최선을 다하여 제 자신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수명이 길고 타 디자인의 재료로 쓰이는 폰트. 디자이너로서 뿌듯해요.”

폰트라는 게, 한 번 출시되고 나면 수명이 길다는 게 장점인 것 같아요. 당장 유행하는 폰트들은 3~4년 유행하고 안 쓰기도 하지만, 윤고딕·윤명조 같은 스테디셀러 폰트나 다국어로 활용하기 좋은 Noto 폰트는 출시된 지 오래되어도 꾸준히 필수 디자인으로서 기능하거든요.

 

또 폰트는 다른 디자인의 재료로 사용되잖아요. 다양한 업종에서 멋지게 활용된 것을 보면 내가 만든 디자인을 인정받은 기분도 들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 것 같은 뿌듯함도 느낍니다. 특히 전용서체는 같은 제품이라도 내가 만든 제품을 먼저 고르는 것 같아요.

 

“영감(inspiration)에 의존하진 않습니다.”

폰트를 제작할 때 정말 다양한 곳에서 영감을 받아요. 멋진 라틴 알파벳이나 한자를 발견하면 ‘한글로 제작했을 때 어떻게 해야 잘 어울릴까’ 생각하면서 스케치를 해보기도 하고, 폰트 사용이 좀 아쉬운 브랜드들이 있다면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고민해보기도 합니다. 1960~1970년대 음반 타이틀 그래픽들을 보면서 이름도 안 남기신 선배님들의 작업에 감탄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실제 일할 때는 영감보다 자형 설계, 그러니까 제가 담당한 브랜드가 원하는 인상을 만드는 작업에 집중합니다.

덕온공주가 한글로 쓴 『자경전기(慈慶殿記)』의 글씨를 원도로 한 ‘덕온공주체’

 

“덕온공주체 복원 프로젝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덕온공주체 복원 프로젝트를 꼭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그동안 제가 개발했던 전용서체들은 주로 고딕 형태였거든요. 덕온공주체 같은 ‘궁서체’를 개발할 기회는 많지 않았어요. 게다가 ‘복원 서체’라서 더 욕심났던 프로젝트였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궁서 흘림을 연구하다 보니, 흘림체만의 고유한 형태가 있다는 걸 배웠어요. 복원도를 결정하면서 내부적으로 궁서 흘림에 대한 판독성 조사를 진행했었는데, 서예를 전공한 친구도 완전히 판독해내지는 못하더라고요. 그만큼 궁서 흘림을 폰트로 복원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업이 점차 진척됨에 따라 글자의 형태가 익숙해지고, 그러다 어느 순간 문장이 막힘 없이 술술 한눈에 읽힐 때 무척 뿌듯하더라고요. 그리고 세로쓰기 흘림에는 한글의 ‘연결쓰기’도 존재하거든요. 알파벳에 합자(Ligature)가 있듯 세로쓰기용 폰트에서 연결글자를 표현할 수 있도록 개발한 점이 좋았어요.

 

저는 덕온공주체를 제작하면서 서예 공부를 시작했거든요. 최정호 선생님, 김진평 선생님도 서예 공부를 강조하셨지만, 제 경우는 쉽게 시작하지 못했거든요. 아마 저뿐만 아니라 폰트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일 텐데, 서예에 대한 조예는 글자를 제작할 때 큰 도움이 됩니다. 아, 그리고 서예와 함께, 프로그래밍 언어인 ‘파이썬(Python)’도 공부해두면 두고두고 유용할 거예요.

 

덕온공주체의 세로쓰기용 서체인 덕온공주옛체 활용 예

 

“최애 폰트 고르기란 늘 어렵네요. 그래도 딱 세 가지만 꼽자면···.”

폰트 디자이너로서 ‘최애 폰트’를 꼽기란 늘 어려운 일 같네요. 일단은 라틴 알파벳 폰트 중에선 길산스(Gill Sans)를 엄청 좋아했었고요, 음··· 한글 폰트는 세 가지만 언급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류양희 디자이너의 ‘고운한글’. 이름처럼 곱고 단정한 느낌을 좋아합니다. 두 번째는 ‘안삼열체’인데요. 제가 ‘이러이러한 폰트가 나오면 좋겠다’ 생각하던 시기에 등장했던 폰트입니다. 제 머릿속의 ‘이러이러한’이라는 형태와 흡사해서 놀라웠던 기억이 나네요.

 

세 번째는 윤디자인그룹 폰트 중 최근에 나온 ‘윤신궁체’입니다. 단정하면서도 흘림의 표현이 잘 나타나 있는 게 특징이에요. 국립한글박물관 특별전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 포스터에 ‘윤신궁체’가 전시 타이틀로 큼직하게 쓰인 걸 봤는데, 연결 획들이 우아한 장식처럼 느껴져서 좋았어요.

 

〈이내말삼 드러보소, 내방가사〉 전시 타이틀 서체로 쓰인 윤신궁체

 

 

 

 폰트 디자이너이자 직업인으로서 드려보는 

 폰트 디자이너 지망생을 위한 약간의 도움말 

 

“폰트 디자인 공부? 목적을 정확히 설정하자!”

제 경우에는 목적 없이 공부하면 효율이 떨어지더라고요. 대학교 시절에 머리 속에 들어오지도 않으면서 맹목적으로 책을 보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많이 읽는데도 머리에 남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뭘 알기 위해 공부를 하려는지 정확한 목표를 설정하는 게 제일 좋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1980년대 레터링 디자인에 대해서 알고 싶다’라고 목표를 정한다면, 80년대 잡지·광고·신문·영상·논문 같은 자료를 ‘선별적으로’ 찾아보면서 문화 전반의 흐름을 읽어나갈 수 있겠죠. 뭐든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읽는 것보다는 훨씬 효율적이고 전략적인 공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클라이언트가 무얼 원하는지를 먼저 물어보기!”

최대한 클라이언트의 원하는 목적을 파악하는 데 집중합니다. 폰트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업체마다 다 다르거든요. 원하는 방향이 확실한 경우에는 맞춰서 준비하면 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킥오프 미팅 때 다양한 질문을 준비해서 니즈를 명확하게 이끌어 내는 것이 중요하죠. 그래야 이후 시안 작업도 수월해지거든요.

 

제 경우는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원만한 편이었는데요. 다만 폰트 전공자가 아닌 클라이언트에게 시안을 정확히 설득해야 할 때 어려움이 있긴 합니다. 그럴 때는 대개 클라이언트의 의견을 수용하고, 이해를 하실 때까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직업으로서의 폰트 디자이너, ‘관찰력’과 ‘지구력’은 필수!”

저는 대학생 때부터 타이포그래피를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이 직업을 선택했던 것 같아요. 운이 좋기도 했고요. 예비 디자이너들에게는 하고 싶으면 일단 해보라고 권해주고 싶어요. 레터링 그리는 걸 너무 좋아해서 폰트 디자이너가 되었다 해도, 어쨌든 ‘직업인’으로서 감내해야 할 부분들이 존재하거든요. 일례로 폰트가 완성되기까지 정말 긴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웃음) 제작 기간 내내 많은 수정을 거치기도 하고, 협업해야 하는 부서들도 많고요. 뛰어난 관찰력은 기본 자질이고, 거기에 지구력도 겸비해야만 오래할 수 있는 직업 같아요.

 

“[덕업일치]는 폰트 디자인에서도 통합니다.”

대학 시절에 산학 협동으로 라틴 알파벳 디자인도 했었고, 모터쇼 엠블럼을 만드는 회사에서 인턴십 생활도 했었어요. 폰트 디자인 포트폴리오가 꽤 쌓인 상태로 구직 활동을 했습니다. 입사 후에는 ‘싸이월드’ 웹 폰트 디자인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당시에는 지금처럼 사설로 배울 수 있는 폰트 디자인 교육 기관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되는 대로 책을 읽거나, 선배들에게 도제식으로 배우는 게 전부였죠. 지금은 상황이 많이 좋아져서 대학과 기업에서 폰트 제작 수업도 많아졌고, 온오프라인 클래스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잖아요.

 

이런 좋은 환경과 더불어, 제가 폰트 디자인 입문 방법으로 추천해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덕업일치’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게임이나 연예인, 영화 등이 있다면 각 대상에 어울리는 글자를 제작할 때 쉽게 흥미를 느끼거든요. 스케치 또는 완료한 작업이 있다면, 이미 출시된 오픈타입 소스 폰트를 백그라운드에 놓고 그 위에서 글자의 간격이나 구조들에 맞춰서 올려놓는 연습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가희 디자이너가 ‘폰트 디자인’ 입문자들에게 추천하는 책 세 권

 

“입문자에게 추천해드리는 책 세 권!”

먼저, 폰트 디자인의 바이블로 꼽을 수 있는 김진평의 『한글의 글자표현』입니다. 꽤 오랜 시간 절판된 상태여서 구하기 어려웠는데 다행히 2019년에 개정판이 나왔죠.

 

두 번째는 소피 바이어의 『활자 기술: 라틴 활자 디자인을 위한 실천 지침』입니다. 제가 라틴 알파벳 그릴 때 많은 도움을 얻는 책이에요. ‘실전 지침’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실제로 그릴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직관적인 그래픽으로 보여줘서 좋습니다.

 

마지막 책은 유지원의 『글자풍경』입니다. 인문학적인 시선으로 우리 생활 속 글자를 발견하고 그것의 탄생 이유와 특징, 작가의 생각 등을 글맛 나게 풀어낸 책이죠.

 

✻ 위 책 표지 출처: 알라딘 ― 『한글의 글자표현』, 『활자 기술』, 『글자풍경

 

 

 

 인터뷰인데 이런 거 해도 될까요? 

 ‘나 자신과의 약속’ 같은 거 

 

“가끔은 마라톤 말고 단거리 경주도 겸하기. 어쨌든, 계속 달리기!”

해가 지날 때마다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2~3년차 때는 일 배우는 것만으로도 바빴어요. ‘이 직업이 과연 나랑 잘 맞을까’ 하는 자아 성찰(?)도 겹쳐 있던 시기라 권태를 느낄 겨를도 없었네요. 5~6년차 되면서부터는 일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거든요. 그렇다 보니 디자이너로서의 열망에 주의를 기울여볼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고 할까요?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폰트 디자인은 굉장히 긴 호흡으로 진행되는 작업이에요. 그래서인지 레터링 디자인 같은 단기 프로젝트에 대한 열망이 있었어요. 다행히 당시 뜻이 맞았던 친구들과 ‘슭곰발’이라는 한글 레터링 프로젝트를 하면서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마라톤을 오래 하다 보니, 단거리 경주에 대한 열망이 생긴 셈이랄까요. 어쨌든, 계속 달리고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웃음)

 

“스스로 기획할 줄 아는 디자이너 되기.”

2016년 오픈타입 배리어블 기술(opentype variable fonts)이 공개되었고, 국내에서는 2021년 현대카드가 기업전용서체 최초로 배리어블을 시도한 ‘유앤아이뉴(Youandi New)’를 발표했습니다. 2019년에는 네이버가 자사의 인공지능 플랫폼인 ‘네이버 클로바’를 활용해서 손글씨 폰트를 제작했어요. 앞으로 폰트 디자인 영역에 어떤 신기술이 등장할지,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지 많은 고민을 해봐야 할 시점입니다.

 

작업 현장이 AI로 대체되어도 인간이 할 수밖에 없는 핵심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제 자신에게 자주 던져보곤 합니다. 현재 시점의 제 답은 ‘기획’이에요. ‘스스로 기획할 줄 아는 디자이너’가 오래 생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단순히 멋진 폰트를 만들고 싶다기보다, 왜 만들고 싶은지를 고민하고 사용자에게 그 의도를 전달하는 디자이너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디자인하는 할머니 되기.”

친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환갑 때도 맥북 들고 만나서 디자인하는 할머니가 되자고 말하거든요. (그때까지도 일을 해야 하는 거냐며 싫다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지만요.) 그러려면 ‘나만의 디자인’이 날이 잘 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오롯이 내가 기획하고 제작한 폰트를 내놓고 싶어요.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거나, 필요에 의해 만드는 폰트도 물론 중요하고 필요한 작업이긴 하죠. 하지만 소모되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거든요. 지금 혼자서 만드는 폰트가 있는데, 여유가 생길 때마다 업데이트하고 있어요. 진행은 조금 더디지만 너무 늦지 않은 시기에 완성하고 싶어요.

 

● ● ● [글자-마음 보기집]은 계속 이어집니다: 시리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