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19.

서울, 부산, 지큐, 에스콰이어, 그리고 시와 소설

 

   안녕하세요. 다시 돌아온 직원 A입니다. 어쩌다 보니 윤디자인그룹 공식 채널 『윤디자인 M』(이하 윤M) 무기명 필자로 지명되었고, 어느덧 네 번째 글을 쓰네요. “이따금 글 쓰는 건 괜찮습니다. 단, 제 실명과 얼굴과 소속 부서와 직무는 공개 안 했으면 좋겠어요. 하하.” 이것이 윤M 운영진에게 제시한 저의 딜(?)이었는데요. 다행히 수락해주셔서 여지껏 ‘얼굴 없는 필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직원 A의 지난 글 
    「넷플릭스 섬네일 아트워크, 그리고 알고리즘」 2021. 10. 22.

    「국내 미개봉(미공개) ‘그래픽 디자인 영화’ 명작 4선」 2021. 10. 29.

    「영화 좋아하는 디자인 회사 직원의 ‘영감 북마크’」 2022. 4. 1.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지난 글 세 편 모두 영화 관련 내용이었네요. 제가 비정기적으로 활동하는 사내 필자고, 정해진 주제 없이 그때그때 관심사를 반영해 글을 쓰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요새는 의식적으로 영화를 멀리하고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영상 콘텐츠를 일부러 안 보려고 노력합니다. 왜냐! 그동안 너무 많이 봤기에···. 과몰입을 했다는 게 좀더 맞는 표현이겠네요. 퇴근 후엔 거실 소파에 누워서 유튜브 콘텐츠와 쇼츠를 보다 잠들고, 주말엔 각종 OTT를 두리번대면서 온종일 영화, 드라마, 오리지널 시리즈에 빠져 지내던 나날들···.

 

   점점 몸 요기조기 군살이 붙고, 뭔가를 ‘시청’하지 않고서는 식사도 휴식도 취침도 제대로 못 하게 된 자신을 발견했어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과감히 OTT 구독을 일거에 해지했습니다. 식후 산책(밥 먹고 10분 안에 10분 이상 걸으면 살찌지 않는다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과 간단한 홈트레이닝도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슬슬 독서에 취미를 붙여보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중고등학생 시절이랑 대학생 때 책을 참 좋아하던 아이였어요. 하ah···지만, 과거의 제 자신으로 돌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더라고요. 영상 콘텐츠 ‘시청’에 익숙해진 제 눈과 세포들이 지면의 활자들 앞에서 자꾸만 ‘배터리 부족’ 경고를 보냈던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면 매번 꿈속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노력 중입니다. 제 눈과 세포들을 늘 응원하고 있어요. “얘들아, 영상 말고도 볼 수 있는 게 있단다. 세상에는 ‘읽기’라는 행위도 존재한단다.”

 

   이렇게 힘들여(부끄럽네요..) 진행 중인 제 독서 목록을 소개합니다. 무작위 선정은 아니에요. 기준을 정해봤는데, 바로 ‘스페셜 피처링 문학’입니다. 시·소설이 패션 잡지나 전시 같은 비문학 분야에 마치 객원 보컬처럼 ‘피처링’ 참여를 함으로써 만들어진 책 네 권을 골라봤습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네요. 이제 바로 소개 들어갑니다.

 

사진: 소장 도서 직접 촬영 ⓒ yoondesign-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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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책 — 『 광장 』, 2022

 

   국립현대미술관(MMCA) 개관 50주년 기념전 〈광장: 미술과 사회 1900-2019〉(이하 〈광장〉) 3부 전시와 연계하여 기획된 책입니다. 〈광장〉은 총 3부작 전시였는데요. 20세기 전반기(1부 전시, MMCA 덕수궁) 및 후반기(2부 전시, MMCA 과천), 그리고 동시대(3부 전시, MMCA 서울)로 이어지는 한국 미술의 역사를 정리했습니다. 20~21세기 한국 미술사 통사(通史)인 셈이죠.

 

   전시명 때문에 ‘광장을 주제로 한 미술전시인가 보네’ 하고 짐작했었는데, 알고 보니 전시 〈광장〉은 소설가 최인훈의 대표작 『광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어요.

 

    최인훈의 소설 『광장』에서 따온 전시 제목에서 암시되듯이, 아직도 여전히 분단국인 한반도에서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시대적 과제를 안고 어떻게 다양하게 이슈화되고 재해석되었는지를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전시 소개 페이지에서 발췌

 

사진: 소장 도서 직접 촬영 ⓒ yoondesign-m

 

   저는 2019년 MMCA 서울관에서 3부 전시만 관람했었어요. 전시 자체도 물론 좋았지만, 전시 아이덴티티와 공간 디자인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타이포그래피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모습이 강렬했거든요. 그리고 이런 강렬함을 어린이 관객들의 눈높이에 맞춰 연성화한 기획도 좋았습니다. 전시를 보고 나서 뒤늦게 도록뿐 아니라 연계 소설집까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돼서 바로 구입했어요.

 

   MMCA판 『광장』은 최인훈의 『광장』이 제기했던 ‘개인과 집단의 문제’를 이어 받은 단편집이에요. 윤이형, 김혜진, 이장욱, 김초엽, 박솔뫼, 이상우, 김사과 등 젊은 작가 일곱 명의 단편소설 한 편씩이 수록돼 있습니다. 각 작품의 분량은 짧지만 주제의식은 제법 묵직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고 고민해볼 만한 내용들이라고 생각해요. 출판사 겸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워크룸의 북 디자인도 책의 무게감을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더 보기 
    MMCA판 『광장』 도서 정보  워크룸 프레스

    〈광장〉 전시 도록 정보  MMCA 미술가게

    〈광장〉 3부 전시의 공간 그래픽 및 홍보물 디자이너 ‘전혜인’ 인터뷰  『타이포그래피 서울

    아동 관객을 위한 〈광장〉 워크북을 디자인한 스튜디오 ‘5unday(선데이)’ 인터뷰 타이포그래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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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책 — 『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 2020

 

   〈2020 부산비엔날레: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와 연계하여 기획·출간된 책입니다. 문집이라고 표현해도 좋을까 모르겠네요. 배수아, 박솔뫼, 김혜순, 김금희, 김숨, 김언수, 편혜영, 이상우, 마크 본 슐레겔(Mark von Schlegell, 미국), 아말리에 스미스(Amalie Smith, 덴마크), 안드레스 솔라노(Andrés Felipe Solano, 콜롬비아) 등 국내외 작가(시인 및 소설가, 순수예술가) 열 명이 ‘부산’을 주제로 쓴 이야기 열다섯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전시의 제목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는 러시아 작곡가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의 작품 『전람회의 그림(Pictures at an Exhibition)』(1874)에서 가져왔다.

   (···) 전시는 10장의 이야기와 5편의 시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무소르그스키가 10개의 피아노 작곡과 ‘프롬나드(Promenade, 산책)’라고 부르는 5개의 간주곡을 분류한 방식과 유사하다.

   (···)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픽션의 층을 통해 관람객들이 도시를 관찰하고 탐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더 나아가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가 관람객들에게 도시와 도시의 역사, 거리나 건물의 겉모습 뒤에 숨겨진 수많은 이야기들을 다시 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를 바란다.

    전시 소개 페이지에서 발췌

 

사진: 소장 도서 직접 촬영ⓒ yoondesign-m

 

   서울에서 나고 자란 저는 늘 부산을 ‘좋은 여행지’로만 생각해 왔었어요.(참고로 제가 꼽는 부산 ‘최애’ 지역은 청사포입니다. 하하.) 그런데 이 책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를 읽으니 다양한 층위의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도시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좀더 입체적인 공간으로 다가온다고 할까요. 아직 완독은 못했는데, 그래서 더 기분이 좋습니다. 앞으로 읽어나갈 재미가 남아 있으니까요. 고백하자면, 이번 윤M 원고를 위해 이 책과 전시 도록을 함께 샀답니다. 👍

 

   더 보기 
    『열 장의 이야기와 다섯 편의 시』 도서 정보  미디어버스

    〈2020 부산비엔날레〉 전시 도록 정보  미디어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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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네 번째 책 — 『 A Man with a Suit & 멀티버스 』, 2011

 

   저는 1990년대에 초중고를 다녔고 2000년대 초 대학생이 됐어요. 제 유년기, 청소년기, 대학 시절은 언제나 ‘잡지’와 함께였습니다. 동네 서점에 가면 다달이 수많은 최신호 잡지들이 도열해 있었어요. 잡지 시장이 호황이었던 때라 잡지들마다 부록도 빵빵했습니다. 언더웨어나 화장품을 주는 패션지가 있는가 하면, 오피스 프로그램 체험판 CD를 주는 컴퓨터 잡지, 아이돌 그룹의 브로마이드나 개봉작 포스터를 주는 연예지와 영화지, 최신 인기 게임의 공략집이나 데모판 CD를 증정하는 게임지 등등.

 

   그래서인지 ‘부록 경쟁’이 심했던 것 같아요. 특이한 것, 소장 가치 200퍼센트인 것, 친구들한테 자랑할 만한 것, 뭐 이런 부록들이 참 많았어요. 당시 제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잡지 사 모으는 데 용돈 대부분을 썼었죠.

 

   이사하느라 청소하느라 이래저래 거의 처분했지만, 저는 《지큐 코리아》, 《에스콰이어 코리아》 같은 라이선스 패션지들을 정말로 많이 모았어요. 패션에 관심이 컸던 건 아니고, 잡지 속 피처 기사들이랑 칼럼들을 좋아했거든요. 특히 《지큐 코리아》랑 《에스콰이어 코리아》는 남성 패션지임에도 꾸준히 한두 꼭지 이상씩은 ‘문학’에 할애를 해서 더 선호했습니다.

 

사진: 소장 도서 직접 촬영 ⓒ yoondesign-m

 

   『A Man with a Suit』는 《지큐 코리아》 2011년 3월호 부록, 『멀티버스』는 《에스콰이어 코리아》 2011년 10월호 부록이었습니다. 앞의 책은 이제하·김원우·성석제·은희경·정영문·김영하·박민규·백가흠·백영옥·김사과 등 당대 소설가 열 명의 단편소설을 수록했습니다. 책 제목처럼 ‘남자의 옷차림’을 주제로 한 짧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어요.

 

   뒤의 책 『멀티버스』는 곽재식·김보영·김창규·박성환·배명훈·윤이형·이수현·정세랑·정소연 등 소설가 아홉 명의 SF 단편을 엮었습니다. TV에서 자주 만나는 곽재식 작가(MBC 〈심야괴담회〉 시즌1에서 ‘괴심파괴자’를 맡으셨던 바로 그분!)의 이름이 반갑네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보건교사 안은영〉의 원작자인 정세랑 작가의 이름도 눈에 띄고요.

 

2011년 당시 《지큐 코리아》 편집장이었던 이충걸의 『A Man with a Suit』 서문

 

   두 책 모두 잡지들의 별책 부록이었던 터라 이제는 서점에서 구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만큼 소장 가치는 금괴급이죠. 다시 읽는 동안, 10여 년 전 동네 서점에 죽치고 앉아(독서용 낚시 의자 서너 개가 서점 안에 있었어요) 이 잡지 저 잡치 들춰보던 시절이 그리워졌네요. 《지큐 코리아》의 『A Man with a Suit』와 《에스콰이어 코리아》의 『멀티버스』를 ‘득템’했던 그해 연말이었던가, 이듬해 봄이었던가, 저희 동네에 하나 남아 있던 작은 서점은 폐점되었습니다.

 

   〈스파이더 맨: 노 웨이 홈〉,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 같은 영화에 나오는 ‘멀티버스(다중우주)’라는 게 실재한다면··· 또 다른 우주 속 저희 동네에, 여전히 그 서점이 남아 있었으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