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성한 독서가는 아닙니다만 책 모으기를 좋아합니다. 일단 방 안에 모셔두었다가 나중에 문득 ‘어, 한번 읽어나 볼까’ 하고 펼쳐 들게 되는 경우도 있고요. 좀 뉴에이지 같은 소리지만, 책과 저 사이에는 뭔가 기류가 흐른다고 믿습니다. 책을 산다고 해서 ‘내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직 못 산 책이라 해도 정서적으로는 ‘내 것’일 수 있습니다. 책에도 각각의 개별성이 있어서, 사람과 결합하는 관계 맺기의 방식이 다 다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는 일단은 사놓고 보자는 쪽이라서, ‘내 책이다’ 하는 기분이 들면 우선 사둡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읽는 식으로, 그렇게 밀고 당기며 책을 읽는 편입니다.
제가 애장하는 책 몇 권을 오늘 포스트에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다시 책들을 꺼내 만지작거리는 동안, 한 권 한 권마다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해서 참 좋습니다.
<영웅문> 전 18권
고등학교 때 이곳저곳 발품을 팔아 모은 <영웅문> 전 18권입니다. 지금은 추억의 출판사가 된 고려원에서 출간되었죠. 중국의 소설가 겸 언론인 김용(金庸)의 대표작입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세 편의 이야기로 연결된 대하무협소설입니다. 본래는 ‘사조삼부곡’이라 불리는데, 고려원에서 <영웅문>이라는 새 제목으로 번역 출간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후에 김영사에서 정식 완역본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정서 함양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영웅문>
용돈 받아 생활하는 고교생이라 열여덟 권을 한번에 구입할 만한 돈이 없었습니다. 전권이 오롯이 진열된 서점 찾기도 힘들었고요. 한 권 읽고, 다음 권 사러 돌아다니고, 이런 식으로 각 권을 모으고 읽었습니다. 서울 강변역 테크노마트 1층에 고려원 출판사 책들만 할인 판매하는 행사장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마지막 권을 가까스로 구할 수 있었습니다. 방 침대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마지막 권을 하룻밤 만에 다 읽었습니다. 중간에 덮을 수가 없을 만큼 완전히 이야기 속에 빠져버렸던 거죠. 지금껏 제 책장 안에 무탈히 꽂혀 있는 <영웅문> 열여덟 권을 보고 있으면 고등학교 때 생각도 나고, 완독하던 순간의 희열도 새록새록 떠오르고 해서 몹시 유쾌해집니다. 이제는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을 거예요. 매우 뿌듯합니다.
<영웅문> 1·2·3부 표지
다시 펼쳐 보니 감개가 무량한 본문
<타이포잔치 2011 도록>
2011년 가을에 열린 ‘타이포잔치 2011: 서울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전시 도록입니다. 이 책에는 한국,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디자이너들이 풀어놓은 작품 해설 및 에세이가 빼곡히 채워져 있는데요. 디자인에 대한 그들 각자의 철학을 읽는 재미가 백미였습니다. 인문학 다이제스티브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일본의 디자이너 키타가와 잇세이(北川一成, Kitagawa Issey)가 쓴 “창조성의 원천은 내 양심의 틈에 있는 의식적인 간과나, 백색 공간이나, 지각에 숨겨져 있다고 믿는다”라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꽤 젊은 축에 속하는 디자이너인데, 자기 철학이 견실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란색 표지가 인상적인 <타이포잔치 2011 도록>
2001년 첫 회 개최 이후 10년 만의 타이포잔치였죠. 이때만 해도 저는 ‘타이포그래피’라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2011년 겨울 윤디자인연구소에 입사하면서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고, 때마침 타이포잔치 전시 도록 리뷰를 쓰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책 욕심이 많기도 했고, 차근차근 편하게 읽으려고 아예 구입을 했습니다. 2011년 겨울이 아니라 가을에 입사했더라면 전시 취재까지 할 수 있었을 텐데. 좀 아쉽습니다.
▶ <타이포잔치 2011 도록> 리뷰 by 임재훈 (다시 보기)
책 본문
<시여 침을 뱉어라>
비교적 최근에 구한 책입니다. 헌책방 사이트를 통해 어렵사리 제 책장에 들여왔지요. 시집을 그리 많이 읽지는 않는데,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집들 정도는 챙겨 보려고 하는 편입니다. 어떻게든 전집을 소장하고 싶은 시인 선생님들이 네 분 있습니다. 김기택, 기형도, 이성복, 그리고 김수영 시인입니다.
<시여 침을 뱉어라>는 김수영의 산문집으로 1975년도에 민음사에서 초판이 나왔습니다. 1968년도 부산에서 김수영이 발표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평론을 표제작으로 싣고, 그 밖에 이런저런 김수영의 시 아닌 글들을 따로 분류하여 묶은 책입니다. 오랜 후인 2000년대에 민음사에서 <김수영 전집> 개정판을 펴냈는데요. 1권 시, 2권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시여 침을 뱉어라>에 수록된 글들은 개정판 전집 2권에 모두 담겨 있고요.
1970년대 중후반에 출간된 <시여 침을 뱉어라> 2판
제가 구한 책은 75년도 초판은 아니고 몇 년 뒤에 나온 2판입니다. 아무래도 70년대 책이라 차례와 본문에 한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다행히 <김수영 전집> 두 권도 모두 소장하고 있어서, <시여 침을 뱉어라>와 <김수영 전집 – 2권>을 동시에 펼쳐놓고 대조해가면서 한자 독음을 느릿하나마 달아두고 있습니다.
모르는 한자에 독음을 하나씩 달아가며 더디게 읽어나가는 중
<페이퍼로드 지적 상상의 길 도록>
2012년에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페이퍼로드 지적 상상의 길’은 전시 규모로나 참여 작가들의 쟁쟁함으로나 굉장한 대기획이었습니다. 저는 특히 “종이의 길 위에서 동아시아 작가들이 만나다”라는 이 전시의 표어를 좋아했습니다. ‘길’, ‘道’, ‘Road’를 하나로 잇는 문화 교류의 장을 열겠다는 취지도 멋졌고요. 전시 관람은 취재를 겸해 했던 것이지만, 굳이 취재가 아니었더라도 꼭 가봤을 겁니다.
전시장에서 보자마자 구입한 <페이퍼로드 지적 상상의 길 도록>
전시장에서 묵직한 장정이 인상적인 도록이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하라 켄야와 마쓰오카 세이코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구매의 모티브는 충분했습니다. 다만, 10만 원대의 가격이 부담스럽기는 했습니다. 그래도 어쩌겠나요. ‘여기에서밖에 구할 수 없는 것은 여기에서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자세로 지갑을 열었습니다.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하하..)
▶ ‘페이퍼로드 지적 상상의 길’ 전시 리뷰 by 임재훈 (다시 보기)
B(북디자인), P(포스터), T(타이포그래피), O(오브젝트) 등
4개 분야 총 네 권 세트로 구성된 도록
<세한도 가는 길>(활판인쇄시집)
파주출판도시에 자리한 활판공방은 국내 유일의 활판인쇄소입니다. 출판사 시월 대표 박한수, 시인 박건한, 출판디자이너 정병규 세 분이 공동 설립했고 2007년 11월 15일 개관했습니다. 2008년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맞아 활판공방에서 ‘활판공방 시인 100선’이라는 표제를 단 납활자본 시선집 100권을 2018년까지 완간한다는 프로젝트를 발표했습니다. 이근배 시인의 <사랑앞에서는 돌도 운다>를 시작으로 오탁번 시인의 <사랑하고 싶은 날>,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 김문희 시인의 <당신에게 가는 길>까지 총 스물두 권이 지금까지 출간되었지요. 지금 소개해드리는 유안진 시인의 <세한도 가는 길>은 그중 한 권입니다. 2009년 6월에 선을 보였고요.
정병규 선생님이 장정한 활판인쇄시집 <세한도 가는 길>
기품이 느껴지는 표지 디자인
납활자로 찍어낸 글자들
활판인쇄시집은 조판, 인쇄, 제본 등 모든 과정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집니다. 수명이 1,000년이라는 전통한지를 인쇄용지로 사용했고, 한정본 1,000권만을 찍습니다. 이런 소장 가치에 비한다면 5만 원이라는 권당 가격은 오히려 너무 낮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앞으로 100권이 다 채워지는 데 3년 여의 시간이 남았습니다. 현재 문선공의 연령대가 70~80대인 점을 생각하면 애가 타기도 합니다. 활판인쇄 기술이 젊은 세대에게도 전수되어 그 맥이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활판공방 특집 1부 by 임재훈 (다시 보기)
▶ 활판공방 특집 2부 by 이희진 (다시 보기)
▶ 활판공방 특집 3부 by 임재훈 (다시 보기)
▶ ‘활판공방 시인 100선’ (관련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