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9.

폰트에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다들 결혼식장에 한 번쯤은 다녀와 보셨죠? 폰트 이야기에서 왜 갑자기 결혼식장이냐고요? 


많은 이의 축복과 격려로 가득한 결혼식장. 이곳에 갈 때면 저는 이따금 로비에서 사람 구경을 한답니다. 수많은 인파 중 특별히 제 눈길을 사로잡는 이들이 있는데요, 바로 함께 모여있는 가족들이에요. 그들과 친분이 없어도 가족임을 알 수 있는 건 서로 닮았기 때문이랍니다. 우리는 피를 나누고 유전적 형질을 공유한 공동체를 가족이라고 부릅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폰트에도 가족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서로를 빛내주는 글자 가족


이것은 보통 ‘폰트 패밀리’, ‘타입 패밀리’, ‘글자 가족’, ‘서체 가족’, ‘활자 가족’, ‘자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요. 


그렇다면 사전에서 말하는 폰트 가족(글자 가족)에 대한 정의는 무엇일까요?


글자 가족(타이포그래피 사전,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저, 안그라픽스 2012, 110쪽 발췌)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면서 한 글자체로부터 여러 가지 갈래를 파생시킨 글자체 집단 


한 글자체가 가진 특성을 유지하면서 여러 개로 파생해 만든 집단을 바로 폰트가족이라고 부른답니다. 

 

타이포그래피 작업을 할 때 하나의 기본정체(Regular)만으로는 다양한 층위(제목, 소제목, 본문 등의 요소)를 효율적으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물론 위의 왼쪽 그림처럼 하나의 폰트로 크기나 색을 조절해서 나타낼 수도 있고, 가운데 그림처럼 여러 가지 폰트를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쪽 그림처럼 하나의 폰트 가족군을 사용하게 되면 사용되는 폰트의 개수가 많아도 한 글자체가 가지는 고유한 특성 때문에 전체적으로 통일성과 안정감, 나아가 다양성까지도 표현할 수 있답니다. 디자인할 때 폰트 가족군이 많을수록 좋겠죠?



폰트 가족이 되려면?


이렇게 아름답고 짜임새 있는 타이포그래피를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폰트 가족은 어떤 기준으로 만들어질까요?


기본적으로는 굵기에 따라 만들어집니다. 기본굵기(Regular)를 기준으로 파생되는데, 보통은 기본굵기(Regular)와 굵은체(Bold) 2단계로 만들어지거나, 가는체(Light)가 추가되어 3단계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보다 더 세밀하게 8~10단계 정도의 굵기로 구분해 더욱 다양한 폰트 가족을 이루기도 하지요. 


대표적인 예로써 한글의 경우는 최근에 제작된 윤서체 700대 시리즈(9단계)와 산돌네오 시리즈(9단계), 릭스고딕(10단계) 시리즈가 있으며, 라틴 알파벳의 경우는 Helvetica(8단계), Univers(9단계) 등을 들 수 있어요. 가장 가는체부터 가장 굵은체까지 최대 10단계로 만들어졌답니다.




이렇게 굵기에 따라 만들어진 폰트가족은 이름 뒤에 로마자로 표현하거나 연속된 숫자를 붙이기도 해요. 요새는 잘 사용하지 않지만 이름 앞에 한글로 표현하는 방법도 있답니다. 예를 들어 아주가는(극세), 가는(세), 조금가는(중세), 중간굵기(중), 조금굵은(중태), 굵은(태), 아주굵은(특태)로 표현하기도 하지요. 여러분도 지금 사용하고 있는 폰트의 이름을 한번 보시겠어요? 이름만으로 폰트가족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여기서 잠깐, 굵기를 파생할 때 유의해야 하는 점!


한글은 라틴알파벳과는 다르게 한 글자 안에서 이루고 있는 줄기들이 많아요. 그래서 굵기를 파생하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첫째, 기본굵기에서 굵어지거나 가늘어질수록 글자 내의 공간도 변하기 때문에 기본 굵기만 일률적으로 조절해서는 안됩니다. 줄기 굵기에 의한 글자 내부의 공간도 조절해야 하는데 조절 과정에서 기준이 됐던 기본 굵기의 글자 형태와 너비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 예가 바로 윤고딕 700대의 받침 ‘ㅆ’  형태입니다. 두 서체가 모습과 글자폭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죠? 


윤고딕710과 윤고딕790에서 나타나는 글자 형태 차이



둘째, 글자의 가독성을 위해 서체가 점차 굵어질 때 글자의 세로줄기와 가로줄기가 동일한 비율로 변하진 않습니다. 한글에는 가로줄기가 많기 때문에 세로줄기와 함께 굵어진다면 글자가 너무 뚱뚱해져 제대로 읽을 수 없을 거예요. 그래서 윤명조 700의 경우 세로줄기보다 가로줄기 굵기의 변화폭을 줄여서 표현했답니다. 



가로줄기 굵기의 변화폭을 대폭 줄인 윤명조 700대 시리즈


 

조정이 가능한 '너비'

 

다음은 너비입니다. 글을 쓰거나 디자인을 할 때 한 줄에 좀 더 많은 글자가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죠? 그럴 때면 글자의 크기나 너비를 줄이기도 합니다. 이를 ‘글자의 장평(長平)을 조절한다.’라고 하지요. 글자의 너비를 강제적으로 줄여서 사용하다 보면 글자의 형태가 왜곡되거나 굵기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답니다. 



그래서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기본정체에서 글자의 너비를 줄인 폰트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것을 장체라고 하며 이와 반대로 기본정체에서 글자의 너비를 늘여서 만든 폰트를 평체라고 부릅니다. 이것 또한 이름 뒤에 장체 혹은 평체를 붙여서 하나의 폰트 가족임을 알 수 있답니다.


영어 폰트는 이름 뒤에 Condensed(장체), Extended(평체)를 붙여 표현하기도 합니다. 라틴 알파벳은 한 글자가 가진 줄기의 개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Ultra Compressed와 같은 폰트도 나올 수 있답니다.





다채로운 글자 표정 ‘이탤릭체’


라틴 알파벳의 경우에는 더 다양한 폰트 가족이 있어요. 주로 본문에서 외래어나 고유명사들을 표현해야 할 때 또는 강조할 때 이런 폰트를 사용하는데요. 



이미지 출처: http://scalafont.com/gallery/


바로 이탤릭체입니다. 기본정체에 기울기를 주어 글자 표정을 차별화하는 역할을 하지요. 


이탤릭체는 본래 필기체에서 유래된 것으로 글자가 기본정체보다 유연하면서도 획의 방향과 속도감을 나타내는 형태를 가지며 글자의 기울기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기본정체에서 기울기형태를 변화시킨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요, 하지만 기울기만을 취해 기본정체에서 기울어진 이탤릭체도 있습니다. 이런 폰트를 더 정확히 말하면 Oblique라고 표현해야 하지만 이탤릭으로 이름 지어진 폰트도 있답니다. 




이탤릭체는 이름 뒤에 Italic을 넣어서 표현합니다. 


한글에는 아직 이탤릭체에 준하는 서체가 많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로그램상에서 강제적으로 기울이거나 아예 다른 성질의 폰트를 사용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 학문적으로 연구한 논문들이 나와 있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다음의 논문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유지원, 라틴알파벳의 이탤릭체와 한글의 흘림체 비교연구, 한국타이포그라피학회, 2012

정영훈, 한글 폰트에서 강조 및 인용을 표시하기 위한 글자체 디자인, 국민대학교 대학원, 2013

(이건 RISS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세리프와 산세리프가 만나면?


앞서 언급한 폰트가족은 기본정체를 기준으로 그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면서 변화시킨 것이라면, 이번에 말씀드릴 것은 기본정체의 뼈대는 간직하면서 글자의 성격을 확 바꾼 폰트 가족입니다.


Scala와 Scala Sans, 고운한글바탕과 고운한글돋움, 서울한강체와 서울남산체….


감이 오시나요?


바탕(명조, 영어의 Serif 계열)과 돋움(고딕, 영어의 San Serif 계열)이 한 쌍을 이루고 있는 폰트 가족입니다. 


기존의 폰트 가족이 동일한 계열에서 이루어졌다면, 이 폰트가족은 계열이 다르지만 동일한 뼈대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어요. 주로 바탕(Serif) 폰트를 기준으로 돋움(San Serif)을 만든 것입니다. 




Scala를 만든 폰트디자이너 마르틴 마요르의 글(폰트클럽 ‘나의 활자 디자인 철학(마르틴 마요르)’ 글 참고)을 보면 '두 개의 활자체, 하나의 형태 원칙'을 가지고 작업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 원칙으로 Scala뿐만 아니라 Seria, Nexus 등의 폰트들을 만들었어요. 이 원칙을 넥서스 원칙(nexus principle)이라고  부릅니다. 잠시 그 원칙을 알아볼까요?


1. 세리프와 산세리프 버전은 공통된 바탕에서 나와야 한다.

2. 세리프체로부터 산세리프체가 파생되는 것은 한층 더 바람직하다.

3. 슬랩세리프체는 다시 산세리프체로부터 파생하면 된다. 

 

참 명확하죠? Scala 폰트가족은 이런 정신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존의 산세리프체와는 조금 다른, 세리프같지만 산세리프적인 독특한 표정을 가지고 있답니다.



고운한글도 그렇습니다. 고운한글바탕을 먼저 만들고 그 뼈대를 기준으로 만들었죠. 그래서 고운한글돋움 또한 색다른 글자표정을 가지고 있어요. 서울한강체(바탕체 계열)와 서울남산체(돋움체 계열)도 마찬가지랍니다.



제가 언급한 것 외에도 폰트 가족의 종류는 더 많이 있으며 그 범위는 점점 넓어지고 있답니다. 


이렇게 폰트 가족이 다양할수록 디자이너들이 작업할 때 더욱 편리하고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겠죠? 실제 사용자들을 위해 오늘도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우리는, 폰트 디자이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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