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3.

폭스바겐 스토리 2부 – 자동차 전쟁의 서막


2013년이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7월입니다. 저는 6월의 마지막을 강원도에서 보냈는데요. 서울로 돌아오니 그야말로 찜통 더위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곧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네요. 이번 주에는 내내 비가 지속될 거라고 하는데요. 이번 장맛비는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국지성 호우를 주의해야 한다고 하는데요. 모두들 안전과 건강에 유의하셔야겠습니다. ^^


<1세대부터 7세대까지의 폭스바겐 골프 / 출처 : 폭스바겐 코리아 페이스북>


6월의 뜨거웠던 더위와 지금 열정적(?)으로 내리고 있는 장맛비만큼 폭스바겐도 뜨겁고 열정적인 핫이슈를 계속 만들어내고 있어요. 이번 달 폭스바겐 ‘골프’ 7세대 모델의 한국 출시 소식이 바로 그 핫이슈랍니다. 폭스바겐은 이번 7세대 골프로 유럽 내 단일 모델 누적 생산 3,000만대를 돌파했다고 해요. 이는 지난 39년간 매일 약 2,000여명이 골프를 구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니, 실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평균 연비 33.1km/L 기록한 폭스바겐 파사트 / 출처 : 폭스바겐 코리아 페이스북>


또한 폭스바겐의 패밀리 세단 ’파사트’는 평균 연비 33.1km/L를 기록하며, 기네스 세계 기록(Guinness World Records)을 달성했다고 해요. 기네스 신기록을 달성한 파사트 2.0 TDI 모델은 독일 엔지니어링 기술을 기반으로 한 폭스바겐의 친환경 디젤엔진인 2.0 TDI 엔진과 6단 수동 변속기가 탑재됐다고 합니다. 파사트는 미국 테네시주 채터누가에 위치한 폭스바겐의 최신 친환경 공장에서 생산되는 모델로, 새로운 폭스바겐 디자인 DNA를 적용한 디자인과 혁신적인 공간구성을 갖춘 폭스바겐의 전략 차종이라고 하는데요. 마치 연비 종목의 김연아 선수 같네요. ^^


폭스바겐의 최근 핫이슈 소식이 너무 길었나요? 여러분께서 한달이나 기다리셨을 폭스바겐 스토리의 2부를 어서 빨리 시작해볼게요. 폭스바겐 스토리 2부 자동자 전쟁의 서막, 지금 시작합니다!


포르쉐 가문에서 시작된 자동자 전쟁의 서막


지난 이야기(폭스바겐 스토리 1부 : 바로가기)에서 다룬 것처럼,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전세계 자동차 역사에 획을 그은 전무후무한 인물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동차 천재이면서도 나치 정권에 적극 가담한 '전범'이었죠. 동업자이자 변호사, 사위인 안톤 피에히, 아들 페리 포르쉐와 함께 연합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페리 포르쉐는 곧 석방됐으나 둘은 옥고를 치러야 했죠.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퀴벨바겐 / 출처  : 폭스바겐 코리아 페이스북>


포르쉐 박사가 히틀러의 주문을 받아 나치를 위해 제작한 무기는 퀴벨바겐 뿐이 아니었어요. 그는 히틀러를 위한 차(퀴벨바겐)를 만들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 유럽 전역을 짓밟은 독일 탱크 티거1과 티거2를 설계하고 영국인을 공포에 질리게 한 복수의 무기 V-1로켓 개발도 도왔을 만큼 나치에 적극 협력했습니다. 


나치와 협력했다는 이유로 연합군에게 잡혀 온갖 고초를 겪은 포르쉐 박사, 폭스바겐과 포르쉐의 시작이었던 그는 1951년 뇌졸중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정의가 살아있다면 폭스바겐과 포르쉐는 꾸준히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겠지요. 딸 루이제와 아들 페리의 손에 넘어간 폭스바겐과 포르쉐는 각자의 길을 걸으며 세계 자동차 산업을 주도하게 됩니다. 


<포르쉐 356 / 출처 : 포르쉐 페이스북>


포르쉐 박사의 아들 ‘페리 포르쉐’는 아버지 보다 먼저 석방되어 포르쉐의 경영자가 됩니다. 그는 1947년 포르쉐 스포츠카의 원형인 356의 설계를 마치게 되죠. 1948년, 독일정부가 전쟁으로 추락한 자국의 경제를 회생시키기 위해 재건한 폭스바겐의 경영인 하인리히 노르트호프(BMW의 기술자, 오펠 임원 출신)와 ‘비틀’ 생산에 대한 러닝 게런티 계약을 체결해 회생의 발판을 마련한 그는 1952년 포르쉐 356의 양산에 성공합니다.



앞서 살짝 언급했던 것처럼, 포르쉐 박사에게는 아들 페리 포르쉐 외에도 딸 ‘루이제 포르쉐’가 있었는데요. 루이제 포르쉐는 페리 포르쉐의 누나입니다. 그녀는 결혼 후 포르쉐 가문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포르쉐의 유럽 내 판매망을 구축했어요. 그녀의 남동생 페리 포르쉐 보다 더 결단력 있는 사업가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 포르쉐 박사의 보석금을 마련한 여장부였습니다.


그런 그녀의 곁에는 남편 ‘안톤 피에히’가 있었습니다. 나치에 협조한 사실로 포르쉐 가문이 고초를 겪을 당시, 포르쉐 가문의 동업자이자 변호사였던 안톤 피에히 역시 그의 장인 포르쉐 박사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답니다. 앞서 이야기를 들려드렸죠? ^^


<1963년 포르쉐 901과 포르쉐 박사의 손자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 / 출처 : 네이버캐스트>


그리고 곧 자동차 전쟁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이 이들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바로 포르쉐 박사의 딸 루이제 포르쉐와 사위 안톤 피에히 사이에서 태어난 외손자 ‘페르디난트 피에히’와 포르쉐 박사의 아들 페리 포르쉐의 장남이자 친손자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입니다. 피에히는 페르디난트의 딸 루이제의 차남으로, 자동차에 평생을 바친 외할버지의 명석한 두뇌와 손재주, 어머니의 사업가 기질을 다 물려받았고요. 부치(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의 닉네임)는 ‘포르쉐에 디자인 문화를 가져온 사람이며, 오늘날 스포츠카들의 형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요. 그가 디자인한 스포츠카 포르쉐 911은 영화 배우 톰 크루즈와 아놀드 슈왈제네거, 축구선수 데이비드 베컴 등 수많은 광신도를 낳았답니다. 포르쉐 박사의 두 손자가 폭스바겐과 포르쉐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자동차 전쟁의 서막이 올려지게 되었어요. 



다음 연재에서는 ‘폭스바겐 스토리 3부 – 자동차 전쟁 : 폭스바겐 VS 포르쉐’편을 이어볼까 합니다. 흥미진진한 포르쉐 가문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