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0. 20.

2016년 가을 어느 날, 국립 한글 박물관의 덕온공주 한글 자료 전시를 돌아보며




하늘이 청명한 가을의 어느 날, 사각형 모니터 앞을 벗어나 지인들과 함께 밖을 나섰습니다. 30분 남짓 걸려서 도착한 곳은 바로 용산에 있는 국립한글박물관(이하 한글박물관)입니다. 한글박물관은 개관한 지 올해로 2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보다는 박물관 앞 정원에 많은 꽃과 과일나무들이 심어져 있어서 이렇게 날씨 좋은 가을날에 산책하기 참 좋은 공간이라 생각했습니다.





한글박물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관계자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좋아했던 유실수들을 많이 심었다고 하네요. 무지렁이인 저는 그 말을 오해하고 세종대왕 때부터 심겨 있던 나무들인 줄 알고 어마어마하게 놀랐다는, 다소 부끄러운 해프닝도 있었답니다.



2016년 가을, 한글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전시


현재 한글박물관에서는 여러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요, 상설 전시 이외에 기획 전시가 한꺼번에 3개가 열리고 있습니다. 개화기부터 현재 한국 사회까지 시대별 광고 언어를 살펴보는 <광고언어의 힘> 전시(~11월 27일까지)와 한글 활자 원도 설계의 거목으로 대표되는 최정호, 최정순, 두 장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두 분의 작업과 이야기를 담은 <원도, 두 글씨 장이 이야기> 전(~11월 17일까지), 그리고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의 한글 혼례 자료를 보여주는 <1837년 가을 어느 혼례날> 전시(~12월 18일까지)가 열리고 있지요. 11월 중순 전에만 가면 세 전시를 다 보실 수 있으니 전시가 끝나는 날짜를 확인하고 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현재 한글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의 포스터들



오랜만에 문화생활을 하는 저로서는 세 개의 전시를 부지런히, 그리고 감명 깊게 보고 왔는데요, 그중에서 가장 소개해드리고 싶은 것은 <1837년 가을 어느 혼례날>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덕온공주의 혼례/혼인 생활과 관련된 한글 자료들을 전시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궁체를 볼 귀한 기회였습니다.



덕(德)스럽고 온(溫)화하게, 덕온공주(德溫公主)


덕온공주는 1822년(순조 22년) 음력 6월 10일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정조의 둘째 아들)와 순원왕후의 셋째 딸로 태어났으며, 조선 왕조에서 왕과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마지막 공주이기도 합니다(출처: 위키백과). 참고로 덕온공주보다 소설과 영화로 대중들에게 더 먼저, 더 많이 알려진 '덕혜옹주'는 조선의 마지막 '옹주'이니 덕온공주와 헷갈리지 마시길 바랄게요. ;D


☞ 공주: 왕의 정실이 낳은 딸을 부르는 호칭

☞ 옹주: 후궁이 낳은 딸을 부르는 호칭

    (출처: <뜻도 모르고 자주 쓰는 우리말 어원 500가지> 중에서)


그리고 덕온공주와 관련된 사람이 또 한 명 있으니, 그는 바로 이 사람입니다.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세자 이영, 

출처: KBS 홈페이지(바로 가기)



인기리에 종연된 KBS2 TV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예쁨'을 얼굴에 붙이고 맹활약을 벌였던 박보검, 아니 '효명세자 이영'이지요. 이 드라마는 역사적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하여 가상으로 쓰인 궁중 청춘 로맨스물이기 때문에 실제와 다른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이건 '드라마'니까요.(저도 잘 보았답니다!) 덕온공주가 순조의 막내딸이므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가 바로 덕온공주의 오빠! 되시겠습니다. 그러나 이 드라마 상에서 덕온공주는 나오진 않으니 참고만 해주세요. ;-]



<1837년 가을 어느 혼례날> 전시장에는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전시의 여는 글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관람객을 차분하게 만드는 낮은 조도의 조명이 반깁니다. 그리고 한지로 된 벽에 4개국어로 전시의 여는 글이 적혀 있지요. 전시는 총 2부로 나뉘는데요, 1부는 덕온공주의 혼례를 통해 조선 후기의 혼례 과정, 혼수품 목록 등을 볼 수 있고요, 2부는 덕온공주의 혼인 생활로써 어머니인 순원왕후의 딸과 사위에 대한 절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편지 덕온공주의 취미생활을 볼 수 있는 친필 서책들을 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시장 내부의 모습, 한쪽에는 영상이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흐르고 있고 

전시장 가운데에는 5m가 넘는 덕온공주의 혼수품목이 적힌 '혼수 발기'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당시 유일하게 생존해있던) 막내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 순원왕후의 따스하고 아린 마음을 서정적인 음악과 함께 애니메이션(아래 영상 참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전시 중간중간마다 증강현실(AR) 기술을 사용하여 조선 시대의 혼례 과정을 보여주거나 순원왕후의 편지 내용을 현대어로 바꾼 것을 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출처: 한글박물관(바로 가기)


 

증강현실 기술을 통해, 바닥에 표시된 그림 위에 흰 종이를 가져다 대면

종이에 '조선 시대의 혼례 과정'을 보여주는 영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었던 것은 <제갈무후마상점>이라는 것인데요, 덕온공주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책 읽고 글씨 쓰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시물 중에 덕온공주의 친필로 된 필사 책들이 몇 권 있었는데, 그 중 <제갈무후마상점>은 새해를 맞이하여 운수를 점치는 책이었습니다.  



새해 운수를 치는 <제갈무후마상점>, 궁체의 반흘림 형태로 쓰인 덕온공주의 친필을 볼 수 있다.



점괘는 총 35개로 '상상'부터 '상중', '상하', '중중', '중하', '하중', 그리고 '하하'까지 총 7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관람객들도 모니터로 함께 운수를 점쳐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와 동행한 지인들도 한 번씩 참여해 보았지요. 저는 '상상'이 나왔고 동행한 폰트 디자이너 이모 님은 '중상', 이 나왔는데, 또 다른 동행자인 기획자 임모 님은… 글쎄… (힘내세요, 나우어님….)


 

그 많은 점괘 중 '하하(下下)' 단계의 점괘를 받고 그저 웃고 있는 임모 님



그랬답니다… 재미로 보는 것이니까요. ;D 여러분들도 전시장 가셔서 한 번씩 해보세요.




조선 후기의 궁체를 보다


저는 궁체에서 한글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그 아름다움을 현대화하려고 서체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궁체에 대해 공부한 것을 잠시 참고해보겠습니다.


글 '새봄체의 제작 과정, 그 원형을 찾아서' 중 궁체에 대한 설명 부분이다. (출처:타이포그래피 서울)



이런 궁체에 대해서 한글을 정형화된 틀에 가뒀다는 평도 있지만, 전 어찌 됐든 궁체를 통해서 한글이 이어져 올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이 전시가 저에게 뜻깊었습니다. 하나의 서체 전형(典型)으로 형성되어 숙성된 조선 후기 궁체의 정자, 반흘림, 진흘림의 형태를 다양하게, 그리고 직접 볼 수 있었으니까요.


 

궁체의 다양한 형태, 정자, 반흘림, 진흘림, 출처: 타이포그래피 서울)




덕온공주의 궁체를 보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덕온공주는 책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습니다. 그래서 여러 서책을 통해 공주의 친필을 볼 수 있는데요, 그녀의 글씨는 주로 반흘림 형태로 나타납니다. 아무래도 개인 소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정자로 쓰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 아름다운 덕온공주의 글씨를 감상해보시죠.


 

한시 <족불족(足不足)>을 풀이한 책으로,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 여사가 덕온공주의 친필임을 밝힌 기록이 있다고 한다.

 

<일촬금(一撮禁)>, 주역의 64괘를 풀이한 점책. 이 역시 윤백영 여사가 덕온공주의 친필임을 밝힌 기록이 있다고 한다.



순원왕후의 궁체를 보다


전시를 다 보고 난 뒤 우리의 머릿속에서 '순원왕후가 참 박복한 팔자구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나라의 왕후였지만 어여쁜 자식들을 다 먼저 보낸 어미이자 남편마저도 먼저 가버렸지요. 큰아들 효명세자가 1830년에 22세 되는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2년 뒤인 1832년 둘째 딸 복온공주 또한 15세의 나이로 떠나버렸으며, 채 그 슬픔이 가시기도 전인 바로 다음 달에 첫째 딸 명온공주도 23세의 나이로 먼저 가버렸던 것입니다. 또, 2년 뒤에 남편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연달아서 가족들을 모두 잃고 남은 가족이 막내딸 덕온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더욱 애틋했던 것 같습니다.


순원왕후는 귀한 막내딸을 시집보내면서 온 정성을 기울였고 혼인을 치른 후에도 딸과 사위에게 편지를 써가며 정성으로 돌본 것으로 보입니다. 이 편지들을 통해 볼 수 있는 순원왕후의 글씨체는 모두 궁체 흘림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편한 가족들에게 쓰는 편지이기에 그 또한 형식을 갖출 필요가 없었겠지요.


 

순원왕후가 사위 윤의선에게 보낸 한글 편지, 궁체 흘림의 형태로 보인다.

 

순원왕후가 딸 덕온공주에게 보낸 한글 편지, 화초에 그려진 시전지에 흘림의 글씨로 썼다.



제3의 글씨?


전시를 보다 보면 흘림 형태의 순원왕후 글씨도 아니고 반흘림 형태의 덕온공주 글씨도 아닌, 제3의 정자 형태로 쓰인 글씨를 볼 수 있습니다. 이 글씨체는 주로 덕온공주의 혼수품에 들어가는 문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요, 왕가에서 보내는 물품이기 때문에 그것에 쓰이는 글씨마저도 형식을 정중히 갖춰서 쓴 것으로 보입니다.


 

순원왕후가 덕온공주에게 준 혼수 발기(좌)와 사위 윤의선에게 준 혼수발기(우)에는

궁체의 정자 형태로 쓰여 있으며, 이는 서사상궁의 솜씨로 보인다고 쓰여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전시는 덕온의 삶의 끝을 이야기하며 마무리가 됩니다. 

 



이럴 수가! 급체사라니요. (T_T) 아아... 

그것도 비빔밥 때문이라니요…


전시를 본 우리는 덕온공주의 마지막 이야기를 보고, 모두 허탈하면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깜짝 놀라기도 했었습니다.(아… 왠지 모르게 스포일러가 된 느낌이네요…) 한 나라 공주의 삶, 그 마무리가 참으로 안타까우면서도 허탈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비빔밥을 조심하자"라는 말을 끝으로 전시장을 나왔습니다.


어떠셨나요? 제가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 걱정되기도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 따로 있으니까요. 그것을 기대하며, 화창한 가을날에 행복하게 혼인했을 덕온공주를 생각하며 한글박물관으로 나들이 나오시면 좋겠습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