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9. 9.

청사포 예찬(禮讚) - 조개구이, 시원 소주 그리고 청사포 바다



충분히 들뜨기도 전에 쏟아지는 비에 짐을 다시 풀어야 했습니다. 비 오는 날씨까지 고려하지 못한 제 탓이었지만 괜시리 여행 시작 전부터 짜증이 밀려옵니다. 여행은 비우는 것부터 시작이라고 했건만 욕심이 과했습니다. 어깨를 짓누르던 짐들을 반이나 덜어냈습니다. 덕분에 출발 시간은 30분이나 지체 되었고 기차표를 취소하고 다음 기차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30분 뒤에 떠나는 기차표를 예매할 수 있었습니다. 천만 다행입니다.





아침부터 비에 지치고 시간에 쫓기며 시작된 부산행이지만 기차를 타는 순간 기분 좋게 출발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급할 게 없거든요. 해질녘 청사포 앞바다가 보이는 곳에 앉아 있기만 하면 되니까요. 애초부터 다른 곳은 가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조개구이와 청사포 바다 생각뿐입니다. 이렇게 초밥 먹으러 일본 가듯 '조개구이 먹으러 부산행'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치유를 위한 바다의 조건


키가 100cm도 되지 않던 코 흘리개 시절,  바다는 크고 넓고 깊고 거칠기만 했습니다. 보는 건 좋았지만 들어가는 것은 싫었습니다. 옷이 젖잖아요. 맑은 물도 아닌 소금물은 물기가 다 마르고 나서도 찝찝하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은 날 자꾸 바닷물에 담가두려고 하셨습니다. 바닷물이 피부를 소독 시켜주기 때문에 '아토피'에 좋다나 뭐라나. 여튼 이상한 이유로 나에게 바다는 치유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어릴 땐 바다를 몸의 치유에 이용했다면 다 커서는 마음의 치유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치유를 위한 바다에는 몇 가지 조건이 따라 붙습니다. 첫째, 파도는 거칠어야 합니다. 소리와 위력에 놀랄 만큼 시원하게 들었다 나가야 합니다. 둘째, 방파제와 등대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방파제 끝 등대 밑에서 먹는 술 때문입니다. 셋째는 바람입니다. 머리칼이 제 멋대로 움직여 머리 속을 흔들어 놓을 만큼 세게 불어야 오만 가지 걱정을 털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배가 있어야 합니다. 운항 중인 배 말고 방파제 뒤에 정박하고 있는 배 말입니다.  



4월의 청사포 / 수리 중인 낚시배

©Yoongorae



지금까지는 치유를 위해 꼭 있어야 하는 바다의 조건이었다면 다음 네 가지는 없을수록 좋은 치유의 조건입니다.

첫째, 사람. 사람 많은 관광지 바다에서는 서로를 피해 다니느라 바다는 느낄 겨를이 없습니다. 보통은 사람 때문에 치유가 필요한 일이 많은데 또 다시 사람이라니. 안될 말입니다. 둘째는 높은 건물입니다.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높은 건물은 양쪽 풍경을 모두 망쳐버립니다. 그 높은 건물 안에서 보는 바다도 매력적이겠지만 그 속에는 모텔이든 호텔이든 숙박 시설이 있기 마련이고 최적의 뷰를 위해 돈을 지불해야 하는 장사 속이 존재하게 됩니다. 셋째는 프렌차이즈 커피숍. 두 번째로 꼽았던 높은 빌딩과 같은 이유인데, 그들은 그냥 좋다고 아무 곳에나 체인점을 내는 법이 없습니다. 프렌차이즈 커피숍이 생겼다는 것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 즉 돈이 보이는 곳이 되었다는 의미거든요. 넷째는 중국인 관광객. 말하지 않아도 알겠죠? 중국에서도 유명해진 곳이라면 더 이상 치유의 장소가 될 수 없습니다. 제주도가 그렇듯 말입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단 한 가지로 귀결 되는군요. 바로 '인공'이라는 단어인데, 사람의 손때가 덜 탄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 내 안에 가득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조금 더 자연에 가까운 곳이라야 치유에 효과적일 테니까요.



청사포는 어떤 바다를 가졌나


7월의 청사포 / 흰색 등대 아래 강태공들

©Yoongorae



앞서 치유를 위한 바다를 언급한 글에서 눈치 챘겠지만 청사포는 우루루 몰려가 여름을 즐기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청사포는 어부의 바다이고 강태공의 바다입니다. 방파제 안쪽엔 조업을 쉬고 있는 낚시 배들이 있고, 방파제 위에는 어둠을 밝혀주는 등대가 있고, 그리고 방파제 너머에는 바다가 있을 뿐 다른 것은 없습니다. 태생적으로 치유를 위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최근 청사포가 인기인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어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청사포의 연관검색어로 조개구이와 붕장어구이가 나오더군요. 제가 먹고 와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그 조개구이. 이번 여행의 테마도 치유를 위한 조개구이가 아니던가요. 사람 입맛이 거기서 거기라고 느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청사포는 위치상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곳입니다. 그래서 어종이 풍부하고 육질이 단단하여 회가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이럴 땐 성격상 맛집이나 유명한 장소를 찾아보는 걸 못하는 제 자신이 참 아쉽습니다.



7월의 청사포 바다를 보며 먹었던 조개구이

©Yoongorae



대개 바다는 사계절에 따라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거기에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바람 심할 땐 또 다른 얼굴을 갖는다고도 하고요. 또 같은 비라고 하더라도 비의 강도에 따라 다르고, 비가 오면서 바람이 적은 날과 비와 바람이 동시에 거센 날은 또 다른 얼굴일 겁니다. 따지고 보면 바다는 1년 중 365번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해도 맞는 말이겠네요.


지난 4월과 7월, 올해만 두 번 청사포에 얼굴 도장을 찍었습니다. 그리고 다행히도 두 개의 얼굴은 180도 다른 얼굴이었음에 감사합니다. 이번 여행의 시작이 비로 얼룩졌음에도 말이에요. 올 4월, 봄의 햇살이 가득했던 청사포의 바람은 몸을 날려버릴 정도로 강했습니다. 두꺼운 니트 사이로 봄바람이 느껴졌으니 말은 다했지 싶습니다. 또 볕이 좋다 보니 색이 다른 두 개의 등대 중 빨간 놈이 더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반면, 비가 날리던 7월의 청사포는 4월에 비해 바람은 덜했지만 하늘과 구름, 그리고 바다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회색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육지에서는 안개가 언덕 위에 있는 건물의 허리를 잘라 먹기도 했습니다. 



4월의 청사포 바다 

©Yoongorae



7월의 청사포 바다 

©Yoongorae



7월의 청사포 /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건물들 

©Yoongorae



4월의 청사포 / 등대 가는 길

©Yoongorae



7월의 청사포 / 등대에서 바라봄 

©Yoongorae



청사포 바다를 보며 먹는 조개구이


4월의 청사포 바다를 보며 먹었던 완벽한 조개구이

©Yoongorae


해가 지기 전에 목적을 이루어야겠습니다. 서두에 밝힌 것처럼 오늘의 메인 이벤트는 바로 조개구이입니다. 아, 그냥 조개구이라고 하면 안됩니다. 수식어가 꼭 붙어야 합니다. '청사포 앞바다를 보며 먹는 조개구이, 그리고 시원 소주'라야 부산까지 온 보람이 있습니다. 


검색 좀 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청사포에는 많은 조개구이 가게들이 있습니다. 완벽한 조개구이를 위해서는 가게의 위치와 자리의 생김새를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제가 고수하는 자리에서 본 바다는 이런 모습입니다. 여길 고른 이유는 자리가 복도 끝에 있어 아무도 이 자리를 넘나들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창문이나 창살로 막혀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라면 밤새 취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조개구이를 먹기 위한 완벽한 뷰

©Yoongorae



청사포에서의 아침, 맑음


청사포에서의 둘째 날 아침은 감히 힐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힐링'이란 단어가 철 지난 단어일진 몰라도 이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찾지 못했거든요. 아직 숙취가 남아 생각과 행동에 미세한 간격을 만들고 있을 때에도 하늘은 맑았어요. 마치 어제 무슨 일이 있었을 지라도 오늘은 너에게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겠다고 말하듯 머리 위에서 파랬습니다. 그래서 '10분 더'를 외치던 평소 생활과는 다르게 벌떡 일어나 햇볕 속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한쪽 눈을 감았고 '찰칵' 셔터를 눌렀습니다. 



해운대 근처 숙소에서 올려다 봄

©Yoongorae



같은 여행지를 다시 찾는 것의 의미


어감의 차이인데 '거기 참 좋더라.'라는 반응의 속뜻은 세 가지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번쯤은 가 볼만 하다.', 다른 하나는 '꼭 가봐라.', 마지막은 '그곳에 살고 싶다.' 앞의 두 가지는 추천의 의미가 크다면, 마지막 것은 여행보다 더 큰 위시리스트가 생긴 느낌입니다. 얼마 전 숙박 관련 TV CF에서 '여행은 한 번 살아보는 거야'라고 했던 것처럼요. 청사포를 다시 찾았다는 것은 '살아보는 것'이란 위시리스트를 실현해보고 싶은 곳이란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닐까요? 적어도 전 그랬습니다.


마르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어떤 장소는 그 주위에 항상 자기의 왕국을 군림시키고, 

정원 한 가운데 먼 옛적의 낡은 자기의 깃발을 내건다."



사람은 누구나 가본 곳에 대해서 자기만의 왕국을 세웁니다. 여행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그곳은 내가 정복한 곳이기에 내 생활 반경 안에 넣게 됩니다. 그럼 살제 살아보진 않았지만 살아본 듯 익숙하게 그곳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도 하죠. 청사포에서 난 나만의 왕국을 세운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너스레를 떨며 사람들에게 내 왕국을 소개하려고 하더란 말입니다. 이 글도 같은 의미에서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을 제 왕국에 끌어들이기 위해서요. 어때요? 제 너스레가 여러분의 마음을 좀 흔들어 놓았나요? 혹여 제 초대에 응하려거든 청사포가 더 유명해져서 호텔이든 모텔이든 프렌차이즈든 들어서기 전에 오세요. 벌써 청사포에 대한 많은 신문 기사가 나고 있거든요. 서두르세요. 언제 가도 좋은 곳이지만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닐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