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4.

폭스바겐 스토리 – 1부 폭스바겐 역사의 시작


성인이 되면 으레 관문처럼 여겨지는 미션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운전면허 따기죠. 운전면허를 따고 나면 누구나 한번쯤은 드라이브에 대한 로망을 갖기 마련입니다. 일단 차를 몰고 다닐 수 있는 자격(?)이 생기니까요. 드라이브에 필요한 건 뭘까요? 당연히 자동차겠죠? ^^


여러분의 드림카는 무엇인가요? 한평생 살면서 한번쯤은 꼭 몰아봐야겠다고 생각하는 드림카, 많은 분들의 드림카 목록에 여러 자동차 브랜드 이름이 올라가 있을 텐데요. 외제자동차 브랜드 이름들도 그중 포함되어 있겠죠? 수많은 자동차 브랜드 중, 오늘은 ‘폭스바겐’에 대한 이야기를 한번 풀어볼까 하는데요. 여러분은 폭스바겐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딱정벌레 자동차, 폭스바겐 이야기


폭스바겐은 한국에서 대중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수입차 브랜드 중 하나입니다. ‘올드 비틀’과 ‘뉴 비틀’ 그리고 ‘더 비틀’까지 이어오는 딱정벌레 같은 자동차, 7세대까지 이어져오는 해치백의 대표 모델 ‘골프’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폭스바겐코리아 폴로 TV CF>


얼마 전, 수입차 시장에 깜찍한 신예가 등장했는데요. 바로 폭스바겐이 새롭게 출시한 소형 해치백 ‘폴로 1.6 TDI R-라인’입니다. 23일 한국 수입자동차업계에 따르면 ‘폴로’는 출시 첫 달인 지난달 57대가 판매된 데 이어 이달 20일까지 250대 안팎이 팔렸다고 합니다. 지난달 판매가 25일부터 시작된 점을 감안하면 거의 한 달 동안 300대 가까이 팔린 셈입니다. 현재 판매 추이면 이달 전체 판매량도 300대를 넘볼 만한 수준인데요. 한국수입자동차협회가 지난달 발표한 ‘베스트셀링카 10위’ 중 10위를 기록한 아우디의 ‘A6 2.0 TDI’ 판매량이 283대였음에 감안하면 ‘폴로’의 10위권 안착은 무난할 전망입니다. 폭스바겐 코리아는 올 연말까지 ‘폴로’를 2000대를 팔겠다고 하는데요. 이제 ‘골프’보다 더 귀여운 ‘폴로’가 등장했으니 폭스바겐의 인기가 더 대단해질 듯 해요.


<출처 : Volkswagen USA 페이스북>


이렇게 쟁쟁한 소형차 모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종종 폭스바겐은 소형차 브랜드로 오해 받고 있는데요. 사실 폭스바겐은 수 많은 자동차 브랜드를 흡수한 거대한 지주회사이고, 자동차 역사를 대표하는 회사들 중 하나입니다. 폭스바겐 광고를 보면 마지막에 ‘Volkswagen. Das Auto.’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요. ‘Das Auto’의 뜻은 ‘The Car’를 의미합니다. 그야말로 그들이 ‘자동차’이며 본질이라는 주장이죠. 


이렇게 자신만만한 폭스바겐에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한번 알아볼까요?


자동차의 역사를 대표하는 폭스바겐의 역사


<독일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 공장 / 출처 : 위키백과>


1937년 설립된 폭스바겐(독일어 : Volkswagen 폭스바겐, VW)은 독일 니더작센주 볼프스부르크에 있는 자동차 제조 그룹으로, 폭스바겐 AG의 지주회사입니다. 폭스바겐하면 브랜드 인수합병 스토리를 빼놓을 수 없는데요. 그것은 폭스바겐을 만든 가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페르디난트 포르쉐’라는 남자에게서 시작됩니다. 지금부터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오스트리아의 자동차공학자였습니다. 그는 1931년 독일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투트가르트에 스포츠카와 경주용 자동차를 제작하는 포르쉐 엔지니어링 오피스(Porsche Engineering Office, ‘Dr. Ing. h. c. F. Porsche GmbH’)를 설립합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1875년~1951년 / 출처 : 위키백과>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레이싱 마니아였습니다. 그는 그의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우승컵을 거머 진 후 집으로부터 온 전보를 통해 들었다고 하죠. 그 아들의 이름은 ‘페르디난트 안톤 에른스트 포르쉐(이하 페리 포르쉐)’입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아들 페리 포르쉐 역시 뛰어난 자동차 설계자였습니다.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고집불통이었던 아버지와 다르게 페리 포르쉐는 사업적인 수완이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독일 경제가 붕괴 조짐을 보이고 어수선해진 틈에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으로 집권에 성공하게 됩니다. 포르쉐 부자는 계획하던 소형차 생산의 꿈을 이루기 위해 히틀러와 협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국민차 생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신차 개발에 전념합니다. 그러던 중 히틀러는 그랑프리 레이스에서 우승할 우수한 경주차 개발을 공모합니다. 페리 포르쉐는 히틀러와의 단독 면담으로 계약을 따내게 됩니다.


<KdF를 살펴보는 아돌프 히틀러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왼쪽 끝) / 출처 : 아시아경제>


한편 포르쉐 부자와 협력하던 히틀러는 1934년 6월 22일 국민차 계획에 최종 승인을 내립니다. 그리고 1936년 포르쉐 부자는 계획했던 KdF(Kraft durch Freude: 기쁨의 힘)라고 명명된 독일 국민차의 원형을 만들어 냅니다. (KdF는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폭스바겐의 딱정벌레 자동차 ‘올드 비틀’의 원형입니다.) 그리고 그 자동차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그것은 국민차라는 뜻의 ‘폭스바겐’이었습니다. 같은 해 포르쉐 박사는 폭스바겐 AG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1939년 볼프스부르크에 폭스바겐 공장이 문을 열게 되고 페리 포르쉐는 책임자로 부임합니다.


히틀러가 독일의 국민차가 갖출 조건으로 요구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른 두 명과 아이 두세 명이 충분히 탈 수 있을 것, 7리터의 연료로 100킬로미터를 갈 수 있을 것, 값은 1000마르크 이하일 것 등이었습니다. 독일의 수상이었던 히틀러가 온 국민이 운송수단을 갖는 것을 바랬던 이유는, 그가 그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독일의 경제 부흥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 입니다. 산업경기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자동차나 도로 같은 국가적 기반시설이 필요했습니다.


<독일군의 주력 전술 차량 KUBELWAGEN TYPE 82>


하지만 그렇게 자동차를 누구보다 사랑하던 부자에게 전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히틀러는 오스트라인인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와 페리 포르쉐에게 독일 국적을 강요하고 군용차 개발을 명령합니다. 독일의 부흥을 선도할 국민차로 개발되었던 KdF는 각종 화기와 캐터필러를 장착한 군용차로 개조되어 폭스바겐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당시 만들어진 퀴벨바겐은 전설적인 군용차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히틀러는 포르쉐 부자의 꿈을 이뤄줄 듯 했지만, 결국 그 꿈을 짓밟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패전한 독일의 슈투트가르트는 잿더미가 되고 포르쉐 부자는 전범에 협조했다는 죄명으로 연합군에게 잡혀 갖은 고초를 겪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정부는 포르쉐 부자를 프랑스 국민차 개발에 이용하려 합니다. 하지만 푸조의 창업자 장 피에르 푸조의 반대로 무산되고 포르쉐 부자는 프랑스 디종 감옥에 수감됩니다.


<독일 스포츠카 대회에서 우승한 포르쉐 356 / 출처 : 포르쉐 페이스북>


페리 포르쉐는 아버지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보다 먼저 석방됩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산골 마을 그윈트의 작은 오두막 집에 포르쉐 설계사무소를 세웁니다. 그사이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는 프랑스의 강요 속에 르노 4CV를 설계합니다. 1945년 8월 1일 이탈리아 치시탈리아에 경주차를 설계해주고 받은 돈으로 아버지의 보석금을 마련한 페리 포르쉐는 1947년 7월 스포츠카 356의 설계를 마칩니다. 356번의 설계 끝에 탄생한 이 자동차는 우리가 열광하는 포르쉐 스포츠카의 원형입니다. 페리 포르쉐의 356은 발전을 거듭한 끝에 1951년 르망 24시 내구 레이스에 출전 우승하게 되고 1952년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갑니다. 미국 수출 길에도 오르며 다양한 모델로 확장됩니다. (전설적인 영화배우 제임스 딘이 몰다 숨진 차가 바로 포르쉐 356A 스피드스터입니다. 그는 포르쉐를 정말 사랑했다고 합니다.)


<포르쉐 911 2.0 생산 / 출처 : 포르쉐 페이스북>


한편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유럽의 경제 부흥과 미국의 번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소비심리가 살아나면서 소비자들은 더욱 크고 강력한 스포츠카를 원하게 됩니다. 포르쉐는 1950년대 말 신차 개발에 착수해 1960년 그 결실을 보게 됩니다. 그 신차를 설계하는 주인공은 바로 페리 포르쉐의 장남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입니다. 바로 이야기의 처음에 등장했던 남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친손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탄생한 신차는 오늘날 포르쉐911 스포츠카의 원형입니다. 포르쉐의 첫 911 스포츠카는 수평대향 6기통 1,991cc 공냉식 130마력 리어 엔진을 얹고 최고속도 시속 210Km/h로 달리며 레이싱 트랙을 지배했습니다. 911의 엔진을 개발한 주인공은 ‘페르디난트 피에히’입니다. 그는 바로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외손자입니다.


직원 1천 명 남짓의 작은 스포츠카 메이커 포르쉐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시작이었던 그 남자,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가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페리 포르쉐는 그의 아버지가 운명한 후 포르쉐의 실질적인 경영주로 활동하지만, 63세가 되던 1972년 주식을 공개하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납니다. 그리고 가족들 역시 가족 회사에서 오는 폐단을 의식하였기에 회사를 떠납니다. 페르디난트 포르쉐 박사의 친손자이자 페리 포르쉐의 장남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는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포르쉐 디자인’을 세워 독립합니다.


페리 포르쉐는 1989년 은퇴를 선언하고 1990년 포르쉐 감독 위원회 의장이 되지만 명예직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998년 3월 27일, 그는 포르쉐 집안의 농장이 있는 오스트리아 첼암제에서 생을 마감하고 부모님과 먼저 떠난 아내의 곁에 나란히 묻힙니다.



이제 페르디난트 포르쉐의 친손자 페르디난트 알렉산더 포르쉐와 외손자 페르디난트 피에히의 이야기가가 남았는데요. 이들이 폭스바겐 그룹을 이끌어가는 모습, 궁금하시죠? 그 모습은 다음 연재에 이어 계속 소개해드릴게요. 궁금하다면 지금 바로 2부 연재를 독촉(?)하는 댓글을 달아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