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8. 10.

[회사원 고난 콩트 시리즈] 을로페셔널 5부. ‘미스터 나이스 가이: 챕터 2’



- 이 이야기는 전적으로 픽션입니다 -


을로페셔널 4부 ‘미스터 나이스 가이: 챕터 1’(바로 가기)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 지난 이야기 •••


클라이언트의 온갖 업무 요청에 ‘Yes’로만 일관해온 Q팀장. 친절이 진저리가 된 바, 그가 일하는 모 대행사 직원들로부터 기피 대상 일순위가 돼버리고∙∙∙. 뒤늦게 ‘No More Mr. Nice Guy’라는 자기 혁신의 슬로건을 내세워보지만 상황은 요지부동. 

그러던 중, 타 부서 사보 제작 담당자의 갑작스러운 퇴사로 얼마간 공석을 메우게 된 Q팀장. 해당 부서의 신입 직원 A대리―시인지 소설인지로 등단까지 했다는, 사내에서 ‘작가님’으로 불린다는 문제적 존재―와 독대해야 하는 난관에 봉착하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Q팀장과 A대리의 갈등은 가히 *콜카캐니언 수준의 골을 파내려가는데, 이 와중에 걸려온 이 회사 대표님의 전화 한 통. “어이 Q, 지금 A대리랑 같이 있나? 잠깐 둘 다 내 방으로 올라오지.” 그렇게 Q & A는 숱한 의문을 품은 채 대표실로 향하는데….


*콜카캐니언(Colca Canyon): 페루 남부 아레키파 주(州)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


대표실에 들어서자마자 상쾌한 청량감이 감돌았습니다. 고급 공기청정기가 구비된 대표실을, Q팀장은 늘 좋아했습니다. 대표님 책상 뒤편에 도열해 있는 각종 화분들 또한 이 공간의 상쾌함에 일조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Q와 A가 입장했을 때, 상하의 모두 아이보리색 세미 정장으로 맞춰 입은 대표는 손거울을 보며 화장을 고치고 있었습니다. 결코 미인이라 할 수는 없지만, 팔다리가 긴 체형과 작은 얼굴의 비율, 그리고 두툼한 쌍꺼풀 덕분에 퍽 매력적인 인상을 주는 대표였습니다. 내색한 적은 없었지만, Q는 대표와의 면담을 언제나 은근히 반겼습니다. 대표의 목 언저리로부터 자신의 코끝까지 은은히 퍼져오는 샤넬 향을 맡을 때마다 묘하게 두근거리기도 했죠. 나와 같은 해 태어난 어떤 여자는 저렇게도 근사한 수트핏을 뽐내는 사업가로 나이 들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얼마간 위축되기도 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Q는 그저 대표와 함께 있는 이 시간을 순수하게 즐기고 있었으니까. 

A는 자신의 카멜색 루즈핏 블레이저를 벗어 한 손에 들고, 가만히 선 채로 눈동자만을 천천히 선회시키며 대표실 구석구석을 탐색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호피 무늬 안경테 너머의 크고 짙은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Q는 마치 시계인양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정지해 있는 것 같으나, 분명히 이동 중인 시침과도 같은 저 검고 동그란 것. 대표의 눈도 저렇지, 하는 실없는 생각도 해보며. 


“어떻게, 둘이 같이 있었네? O부장이 두 사람, 요기 어디 카페에 가 있다고 하더라구. 둘이 뭔데? 연애라도 해?”


대표는 특유의 하이톤 목소리와 다소 빠른 말투로 농담을 던졌습니다.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기 전 거치는 일종의 프롤로그. Q팀장은 괜스레 또 두근거렸습니다. 화장 도구들을 가죽 클러치백에 골고루 담은 대표가 다음 말을 이었습니다. 


“아, 일단, 서 있지 말고, 좀 앉아봐요.”


국내 유명 가구 디자이너가 대표에게만 특별히 선물했다는 고급 소파에, Q와 A가 나란히 앉았습니다. 대표도 곧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았습니다. 역시나 아이보리색으로 맞춘 대표의 윙팁 구두가 Q의 무릎에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Q는 또다시 두근거렸습니다. 


“카페에 들렀다 온 거니까, 뭐 마실 필요는 없을 거고, 그렇죠? 긴 얘기 아니니까, 그냥 편하게 들어줘요. 두 사람 서로 통성명은 했을 거고, 사보 제작 같이 하게 될 거란 건 이미 전달받았을 거고, 음, 둘이 무슨 이야기를 어디까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말야, 무슨 이야기를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있어요?”


조금 전 카페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그러니까, 한층 부드럽고 느릿한 저음으로 A가 되물었습니다. 심지어, 미소까지 곁들인 표정으로. 


“어떤?”


모태 매너남 Q팀장의 귀에는 상당히 거슬리는, 대단히 버릇없이 들리는 ‘짧은’ 말투. 그러나 대표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응? 모르고 있었구나? 회사에 입들이 워낙 많아서 이미 얘기기 돌았는 줄 알았네. 정말 모르는 거지? Q팀장도 전혀?”


“예? 아, 음, 네, 모르는 것 같은데요. 어떤 이슈인가요 대표님?”


대표는 다른 쪽 다리를 바꿔 꼬으며 입 언저리를 검지로 살살 긁었습니다. 지난주 레드와인 색이었던 손톱이 이번 주엔 코발트 색으로 바뀌어 있음을 Q는 간파했습니다. 나 혼자만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기분이 들어 Q는 괜히 흐뭇했습니다. 


“그렇구나, 진짜 몰랐구나. 음, 그래요, 모를 수도 있지, 아니, 모르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야.”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는, 언제까지고 저렇게 뜸을 들일 것만 같은 대표의 화법에 Q는 오히려 더 매력을 느꼈습니다. 


“두 사람도 알다시피, 요즘 우리 회사에 퇴사자들이 많잖아. 그건 알고들 있죠? 응, 그래, 모를 수가 없죠. 그래서 말예요, 내가 요즘 고민이 참 많거든. 밤에 잠도 잘 안 오고. 그래서 결단을 내렸어요. 내가 얼마나 맘고생을 했는지 모를 거야. 음, 그래, 더 돌리지 않고 말할게요. 우리 회사가 그동안 해왔던 사업들을 대폭 조정하려고 해요.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갓잇?”


“수익 부서들만 생존시킨다는 말씀?”


A는 줄곧 말이 짧았습니다. 담대한 건지 예의가 없는 건지는 잘 판단이 안 서지만, 어쨌거나 기업 내 최고 결정권자 앞에서도 시종일관 자신만의 ‘말버릇’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건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고 Q는 생각했습니다. 아, 그런데, 수익 부서들만 생존시킨다, 라는 건..? 


“그래요. 맞아요. 사실, 사보 제작 일이라는 게 큰돈은 안 되는 거, 두 사람도 잘 알 거예요. 사보 제작팀을 포함해서 총 5개 부서를 통폐합 할 계획이거든. 그래서 둘을 부른 거야.”


‘사보 제작팀을 포함해서 총 5개 부서를 통폐합 할 계획이다’와 ‘둘을 부른 거야’ 사이에 놓인 ‘그래서’라는 접속사의 의미를 Q는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늠해보려 해도, 두 말의 거리는 너무나 아득했습니다. 


“아, 아, 표정들 풀어요. 릴랙스. 퇴사하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야. 어쩌면 퇴사보다 더 어려운 일이지.”


“퇴사보다 어려운 일?”


A의 말은 여전히 짧았습니다. 감히 우리 대표님에게 저런 말버르장머리를 보이다니, 고얀 녀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저 녀석은 대체 어떤 교육 환경에서 자랐길래, 아니, 어떤 언어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길래 꼬박꼬박 말꼬리를 자체 제거하는 기교를 부리는 것일까, Q는 또 한 번 감탄과 더불어 약간의 노여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말을 자꾸 짧게 줄이는 걸로 봐서, 녀석의 등단 분야는 필시 소설보다는 시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확신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이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의 일부로 인지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나가는 대표였습니다. 


대표는 다시 한 번 다리를 바꿔 꼬고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겼습니다. 어깨 길이의 검은 생머리를 뒤로 바짝 당겨 고정시켰다가 두 손에 힘을 풀자, 넘겨졌던 머리칼이 무너지듯 쏟아져 내려왔습니다. 대표는 헝클어진 머리를 빠른 동작으로 매만지고 다음 말로 넘어갔습니다. 


“Q팀장이 벌써 입사 13년차죠? 우리 회사 창립 멤버니까 말야.”


“네, 하하, 네, 그렇습니다. 어느새 시간이..”


“Q팀장이 당분간 경영을 좀 맡아줘요.”


이 상황이 만약 미디어 플레이어로 재생 중인 동영상이었다면, 어떤 착오에 의해 일시정지(II) 상태가 돼버린 게 아닌가 싶은 정적이 약 5초간 대표실을 장악했습니다. 이윽고 눌린 플레이(▶) 버튼은 이 극적인 상황을 더욱 충격적인 흐름으로 몰고 갔습니다. 심각한 재생 오류가 아닐까 싶었지만, 노, 네버, 이건 명백한 현실의 영상이었습니다. 


“누나!”


일시정지가 풀리자마자 A대리의 입에서 튀어나온 일갈. 누나, 라니? Q는 아직 사태 파악에 곤란함을 겪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버릇이 없는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근본이 없는 놈이었군, 하고 비난하려는 찰나, Q의 뒷골을 서늘하게 만든 몇 가지의 정황들. 그래, 어쩐지 눈동자가 비슷했다.. 말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퇴사자 속출에 책임을 통감하며, 저는 당분간 대표직에서 물러나려고 해요. 우리 회사 최장 근속자인 Q팀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싶습니다. A는 Q팀장, 아니, Q대표 밑에서 잘 배우고.”


대표가 입은 세미 정장의 아이보리 색이 점점 퍼져나가며 Q의 시야를 뿌옇게 만들었습니다. 하얘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에 묘사된 실명의 징후가 서서히 Q를 몸서리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이 하얀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리라곤 오직 “누나!”라는 이명뿐.. 



을로페셔널 6부. ‘미스터 나이스 가이: 챕터 3(마지막 회)’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