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9.

아티스트가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


배경 이미지 출처: 슬로워크


세계적으로 사건, 사고가 많은 요즘입니다. 그만큼 기억해야 할 날들이 늘어난 것이기도 합니다. 기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을 것입니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된 누군가, 혹은 어떤 일을 기억하는 것과, 나와 직접적으로 무관한 누군가, 혹은 어떤 일을 기억하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직접적인 무관은 거시적으로 볼 때 결국 나 자신과 어떻게든 간접적으로 연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오늘의 저 사고 현장은 내일이든 모레든 또는 언제든 나의 행동반경 안에서 재현될 수도 있지요. 지금은 전혀 안면식도 없는 이가 나의 일상에 주요한 인물로 틈입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마땅히 기억해야 할 공공의 현상∙사건∙인물을 가급적 많은 대중이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의도랄까, 이른바 메모리얼로서의 행동(action) 또는 운동(movement)은 지속적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비극적인 사고 이후의 추모 행사, 역사적인 인물을 기리는 애도 모임처럼 말입니다. 이런 활동의 전면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맨 뒷줄에서 큰 역할을 하는 이들이 바로 아티스트들입니다. ‘표현’이라는 것에 능한 아티스트들은 특정한 이슈가 지닌 사회적 함의, 기억의 당위성 같은 다양한 내적 의미들을 잘 함축하는 일을 합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습니다만, A4 용지 10매 분량의 보고서를 핵심 사안만 추려 1매로 축약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단순히 테크니컬한 요약 정리는 아닐 것이며, 이를테면 소설책 한 권의 내용을 시나 노랫말로 읊는 퍽 고뇌의 작업일 것입니다. 중세 유럽의 음유 시인들이 당대의 영웅담과 비극을 운문으로 만들어 전파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앞칸 권력자들에게 자식을 빼앗긴 꼬리칸 빈민 여성에게, 한 아티스트가 아이의 초상화를 그려 엄마에게 주던 장면 말입니다. 엄마는 그 초상화를 품에 소중히 끌어안지요. 이렇듯, ‘아티스트가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은 예술의 효용성에 관한 가장 합당한 증거가 돼줄 거라 생각합니다. 


해외 아티스트 다섯 명과 국내 디자인 스튜디오 한 곳이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들, 즉 그들이 특정한 사건과 사고를 소재로 창작한 작업물들을 모아봤습니다. 



1977년 미국 뉴욕시의 여행 장려 정책의 일환으로 제작된 로고입니다. 

그래픽 디자이너 밀튼 글레이저(Milton Glazer)의 작업이지요. 

출처: Wikipedia


2001년 9월 11일 이후, 글레이저가 24년 전의 뉴욕시 로고를 가지고 만든 포스터입니다. 

2001년 9월 19일자 『데일리 뉴스(Daily News)』 앞면과 뒷면에 인쇄됐었습니다. 

출처: MiltonGlaser.com




 

미국의 지역 잡지 <보스턴 매거진(Boston Magazine)> 2013년 5월호 커버입니다. 

포토그래퍼 밋첼 파인버그(Mitchell Feinberg)의 작업입니다.

같은 해 4월 13일 보스턴 마라톤 경기 중 일어난 폭탄 테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폭탄이 결승선과 가까운 지점에서 터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위 사진의 ‘We Will Finish The Race’라는 문구는 대단히 묵직하게 읽힙니다.

출처: AmericanPhotoMag.com

 



 

2015년 11월 13일 이후로 ‘13일의 금요일’ 운운하며 

괴기스러운 농담 따먹기를 하는 식의 말장난은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파리 시내 한복판, 금요일 밤을 즐기던 사람들이 총에 맞았습니다. 사망자 수만 약 130명. 

테러 이후의 비극에서 한 아티스트가 외친 건 절규를 억누른 ‘평화’였지요.

‘Peace for Paris’라는 이름의 위 심벌은 프랑스의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쟝 줄리앙(Jean Jullien)이 자신의 SNS에 게시한 이후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갔습니다. 

파리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세계 평화를 기원하는 상징이 되었지요. 

출처: WIRED.com / 아래 출처 동일



 

옷과 신발, 집회 현장 등에 사용된 ‘Peace for Paris’ 심벌




 

2004년 독일을 비롯한 12개국은 매년 1월 27일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고통받았던 모든 이들을 기리는 날로 정했습니다. 

2004년 1월 27일 이스라엘을 시작으로 해마다 각국에서 메모리얼 행사가 열립니다.

위 이미지는 2012년 행사의 공식 포스터로서, 스위스 바젤 디자인 학교 졸업생이자

예루살렘 출신인 도리엘르 림머(Dorielle Rimmer Halperin)의 작업입니다. 

지팡이를 짚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검은 실루엣 밑으로, 

그의 유년기였을 어린 소년과 가족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포스터에 적힌 문구는 ‘홀로코스트 순교자와 영웅들의(Holocaust Martyrs' and Heroes’)’입니다.

이 행사의 공식 명칭이 ‘Holocaust Martyrs' and Heroes' Remembrance Day’이기도 하지요.

출처: DILW.ie




 

2011년 3월 11일, 재난 영화에서나 봄직한 자연재해가 일본에서 일어났지요. 

이날 오후 2시 46분경 일본 동북쪽에서 진도 9.0의 대지진이 발생한 뒤, 해일(쓰나미)이 일었습니다. 

후쿠시마 제1 원자력발전소(다이치 원전) 전원 공급이 끊기면서 원자로 냉각이 중단되었지요. 

냉각되지 않은 핵연료로부터 수소 가스가 발생했고, 그것이 폭발을 일으키며 방사능 누출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캐나다의 그래픽 디자이너 제임스 화이트(James White)가 ‘Help Japan’이라는 제목의 

포스터(위 포스터들 중 첫째 줄 맨 왼쪽)를 제작하고, 판매 수익을 지진 피해자들에게 기부했었는데요. 

이 활동이 세계 각국의 디자이너들에게 알려지며 

일종의 릴레이 형식으로 포스터를 통한 모금 운동이 진행됐었습니다. 

출처: INDER NAGRA




 

2014년 4월 16일로부터 어느새 2년이나 넘는 날들이 흘렀습니다. 

여전한 아픔과 얼마간의 체념과 계속되는 호소 들이 기나긴 문장처럼 

한 시대의 페이지를 빼곡히 채워나가는 중입니다. 

문장의 내용이 아리고 사무치는 만큼, 부디 그 모든 문장들을 품을 수 있는 

넓고 깊은 결구가 오기를 바라는데, 그 결구를 완성해주어야 할 높은 이들로부터는 

이렇다 할 단문조차 쓰여지지 않는 듯해 더 가슴이 먹먹합니다. 


우리나라의 디자인 스튜디오 슬로워크(Slowalk)에서 2015년 특별한 달력을 제작했습니다. 

텀블벅 후원을 통해 제작된 이 달력은 이른바 ‘4.16 달력’이라 불립니다. 

표지에 가지런히 적힌 ‘기억하라, 그리고 살아라’라는 제목은 나희덕 시인이 붙여주었다고 하네요.

러시아 작가 발렌틴 라스푸틴(Valentin Rasputin)의 소설 제목이기도 합니다.

표지를 넘기면 1월에 앞서, 나희덕 시인이 쓴 동일한 제목의 시를 만나게 됩니다. 



 

덩굴이 나무 위로 기어오르고 있다 

벌들이 꽃에게로 접근하고 있다 

아무도 이것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든 것은 이루어지고 있음을 

기억하라, 마지막 순간까지 

누구도, 우리조차 우리가 살아 있음을 알지 못했으나 

덩굴이 나무를 정복하듯이 

꽃이 열매를 맺듯이 

마침내 이루리라는 것을 기억하라 

우리의 숨은 눈을 통하여 

마침내 붉은 열매가 

우리를 넘어서 날아오를 때까지 

살아라, 그리고 기억하라

 


 

정갈한 인상의 달력은 열두 달을 통틀어 휴일 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4월 면에는 노란색 종이가 별첨되어 있습니다. 종이배 접기 설명서와 함께 말입니다. 

4월 16일을 기억하는 이 달력의 방식이겠지요.

4.16 달력 이미지 출처: 슬로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