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5.

그 남자의 주말 취재 블루스 – 2부 : 바다의 히든 트랙



[지난 이야기]

클라이언트 잡 종사자인 남자는 ‘2013 춘계 희망기원 만리포 만인 입수대회(春季 希望祈願 萬里浦 萬人 入水大會)’라는 행사 취재를 위해 서해 만리포로 향합니다. 비 내리는 일요일, 남자는 자신의 차 안에서 헤어진 연인(곧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는 그녀)이 남긴 블루스 CD들을 틀어놓습니다. 빌리 홀리데이의 ‘아임 어 풀 투 원트 유(I’m a Fool to Want You, 당신을 원하는 난 바보랍니다.)‘가 흐르자, 남자는 기어이 센티멘탈해집니다. 텅 빈 조수석에 옛 연인의 잔상이 앉아서 조잘거리는 듯합니다. 남자는 말없이 빗속을 운전합니다.



<빗길의 저- 너머엔 바다가 있겠죠?>


빗길의 끝, 만리포


빗길 정체 때문에 지각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제 시간에 도착 완료. 행사장인 만리포 해수욕장은 한산했습니다. 이런저런 언론사에서 온 사진기자 몇몇끼리 구름과자를 나누며 지루함을 달래고 있습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행사 진행 스태프들이 기자들에게 캔 커피를 건네며 “행사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저의 주요 연락책인 클라이언트 측 담당자 김대리님도 저 멀리 보입니다. 해변가 근처에서 휴대폰을 붙잡고 누군가를 다그치는 중인 듯 하네요. “전우회 회장님이 연락 불통이라고? 지금 장난해? 기자님들 지금 다 와 계시거든? 지인이든 가족이든 전화해서 얼른 좀 오시라고 해!” 


듣자 하니, 오늘 만리포에 입수하여 단체 군가를 제창할 중년의 ‘희망용사 전우회’ 회원들이 아직 다 모이지 않은 관계로, 행사 일정이 늦춰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미 이틀 전 배포된 보도자료에는 오늘 행사가 16시부터 시작된다고 써 있었지만, 현재 시각은 16시 15분. 오늘 제가 할 일은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내일(월요일) 오후 1시 안으로 행사 스케치 원고 작성 및 동영상 편집까지 마무리하여 클라이언트 측 블로그에 게재해야 합니다. 행사가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오늘 집에 들어가 잠을 잘 수 있는 확률은 낮아집니다. 그나마 고맙게도 빗줄기가 얇아졌습니다. 바다 위 먹구름들 사이로 해가 조금씩 보이기도 합니다. 희망용사 전우회 회장님만 나타나주시면 되겠는데... 먼 곳에서 휴대폰과 씨름하던 김 대리님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행여나 눈이 마주치기 전에 저는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차를 세워둔 주차장 쪽으로 슬쩍 이동합니다.


바다의 히든 트랙


<바다는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듣는 것>


차 뒷좌석 문을 열고 주섬주섬 카메라와 삼각대, 영상 촬영용 캠코더를 챙깁니다. 행사장 쪽을 바라보니, 여전히 사진 기자들은 구름과자와 캔 커피를 즐기고 있는 상태입니다. 스태프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죽이고 있습니다. 그새 친해졌는지 남녀 스태프 몇 커플은 해변가를 거닐고 있기도 합니다. 그 와중에 김대리님의 격정적인 통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집니다. 희망용사 전우회 회원들은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현재 시각 16시 30분. 목에 걸고 어깨에 멨던 카메라와 삼각대와 캠코더를 다시 차 뒷좌석에 내려놓고 운전석으로 들어가 차문을 닫습니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차 문을 모두 잠급니다. 이 순간, 아무도 내 세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창 밖 세상은 이윽고 묵음(mute)이 됩니다.


“옛날 극장에선 ‘벤허’나 ‘아라비아의 로렌스’처럼 긴 영화를 상영할 때는 ‘인터미션(intermission)’을 줘서 관객들이 잠깐 쉴 수 있게 틈을 뒀다고 하잖아. 뭐, 물론 한창 몰입 중이었던 감정 선이 중간에 끊기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오줌 마렵고 다리 저린 거 참아가면서 계속 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아? 선배가 동의하지 않아도 좋아. 난 그렇다고. 빌리 홀리데이가 나한테는 그런 인터미션이고 포즈(pause)야. 그냥 다 정지시켜버리는 목소리. 듣는 순간 나도 정지되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 선배도 너무 아등바등 살지 말고 종종 일시 정지 버튼도 좀 누르라고. 그런 버튼이 있기나 한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은 수도꼭지 같아요. 닫혀 있기도, 열려 있기도 하니까. (Love is like a faucet, it turns off and on.)“, 

빌리 홀리데이 / 출처 : Amazon>


차창 밖 세상이 묵음이 되자 귓가에 들려오는 그녀의 환청. 조수석에 앉아 삐죽 내민 입으로 끊임없이 궁시렁거리던 왈가닥. (실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건 바로 너였잖아...) 흔히 이별한 아니, 이별을 당한 쪽 귀에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히든 트랙(hidden track)처럼 박히게 마련입니다. 얄궂게도 이 히든 트랙은 제멋대로 재생이 되어버리곤 하죠. 어디에도 정지 버튼은 없습니다. 일단 재생이 되고 나면, 끝까지 듣는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녀에게 인터미션이자 포즈였다는 빌리 홀리데이를 다시 틀어봅니다(▶). 홀리데이의 음성이 제게도 정지 버튼(■)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면서, 그녀라는 히든 트랙이 소멸되기를 바라면서... 차 안에는 ‘엔드 오브 러브 어페어(The End of a Love Affair)’가 흐릅니다.


<빌리 홀리데이의 ‘The End of a Love Affair’>


난 너무 빨리 걸었고, 너무 빨리 운전했어요.

그리고 난 진실에 신중하지 못 했어요.

하지만 이미 사랑은 끝났는데, 당신이 더 이상 뭘 해줄 수 있겠어요.


So I walk a little too fast and I drive a little too fast

And I'm reckless it's true, but what else can you do

At the end of a love affair?


그래. 이미 사랑은 끝났는데 네가 뭘 할 수 있겠니, 그리고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이런 생각에 취해 있던 순간, 차창 밖으로 장정들의 요란한 기합 소리가 들려 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희망용사 전우회 회원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군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곧 바다로 뛰어들 모양입니다. 부리나케 뒷좌석의 취재 도구들을 챙기고 나가려는데, 도어 락이 풀리지 않습니다.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전 좌석의 문이 굳게 닫힌 채 저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어디에선가 매캐한 고무 타는 냄새가 납니다. 시트가 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아까 아무 데나 던져두었던 담배 꽁초가 불씨인 듯합니다. 


“김대리님!” “사람 살려요!” “제 목소리 안 들려요?!” 


소리도 질러보고 차창을 두드리면서 클랙슨을 울려봤지만, 차창 밖 세계의 사람들은 모두 희망 전우회의 군가 제창에 집중해 있습니다. 좁은 이 공간에 저는 갇혀버린 것입니다. 매캐한 연기가 안개처럼 짙어집니다. 식은땀이 흐르고... 전신이 천천히 헐거워짐을 느낍니다. 눈이 감깁니다.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연기 속에서 흐릿해집니다. 나 자신이 이 세상의 히든 트랙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살려달라는 고함의 볼륨은 줄어들고... 점차 묵음의 세상이 되어갑니다... 이대로... 내 트랙은 끝나는 건가...


(2부 끝. 3부가 기대되시면 댓글을 달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