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스(Blues)

노예 해방 이후 19세기 후반 미국 남부에서 시작된 흑인 민요의 일종.

흑인들의 고달픈 생활이나 심정을 호소한 것이 많지만, 낙천적인 블루스도 없는 것은 아니다.

블루스야말로 미국 흑인 생활의 시(詩)이며,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노래라 할 수 있겠다

_ 한국언론진흥재단 매스컴대사전 참고


혼자 사는 남자의 일요일 아침, 지난밤 연거푸 마신 캔맥주들 때문인지 속이 쓰립니다.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이유가 일곱 가지는 훨씬 넘는다고 말하는 자기기만(自己欺瞞)의 독신남. 여느 일요일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주말 근무가 있습니다. 언젠가 주말 근무에 대해 투덜거렸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신은 6일 동안 세상을 만들고 딱 하루 쉬었어. 신도 주 6일 일한 거야. 선배(그녀와 저는 캠퍼스 커플이었습니다)가 주말 근무에 불만을 갖는 건, 그러니까 신성 모독이라 할 수 있는 거지. 억울하면 선배도 선배만의 세계를 창조해보든가.”


그녀다운 쿨한 핀잔. 독주보다 알싸한 쓴 소리, 그러나 달콤한... 우리는 딱 1,800일 만에 헤어졌습니다. 오늘은 그녀와 헤어진 지 200일째 되는 날이며, 그녀에게 고백한 지 2,000일째 되는 날입니다. 5년이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우리는 주로 평일에 만났습니다. 그 흔한 커플 여행 한 번 떠나보지 못했습니다. 대학생 시절에는 취업 준비하느라 그랬고, 회사원이 된 뒤에는 그녀와 저 둘 다 주말 근무에 매인 몸이었거든요. 그녀는 씩씩했습니다.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토요일~일요일이든,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똑똑하기까지 한 그녀는 추가 수당을 못 챙길지언정, 반드시 상사나 대표로부터 거한 식사 대접을 받아내곤 했습니다. 작은 중소기업의 서무과 직원이었던 그녀. 결국 3년간 뼈를 깎는 시간(그녀는 실제로도 뼈를 깎았습니다. 양.악.수.술.)을 보낸 뒤, 모 공룡기업 제품 기획팀의 경력사원으로 이직했습니다. 대학 시절에도 그녀는 늘 당찼죠. 교수님들의 저서나 강의안에 대해 빈틈없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었던 학생은 늘 그녀뿐이었으니까요. 남자 학우들 사이에서 교내 비공식 메이퀸으로 통하던 그녀. 일요일 아침 동아리방에 가면 항상 그녀가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쉴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신뿐”이라며 맹렬히 공부하던 여자 인간.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이브(Eve)를 만나러 간 일요일 아침의 동아리방에서, 저는 그만, “너를 많이 좋아해...”라고 말해버렸습니다. 그 고백을, 그 설익은 무화과를, 저의 이브는 덥석 물어주었습니다.


우리가 헤어진 지 357일째 되는 날이자 그녀에게 고백한 지 2,157일째 되는 날에, 그녀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녀 부서의 제1호 사내 부부라는 이야기도... 달력을 보니 그날도 일요일이더군요. 아마 그날도, 저는 주말 근무 중이겠죠.


자기기만(自己欺瞞) 독신남의 주말 스케줄


클라이언트잡 종사자인 제가 일요일에 하는 일은 간단합니다. 클라이언트 기업에서 주최 및 주관하는 행사를 취재하고, 홍보용 콘텐츠로 제작하는 것이죠. 오늘의 행선지는 조금 멉니다. 제가 사는 서울에서 3시간쯤 걸리는 서해 만리포라는 곳. 봄이긴 하나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요즘 날씨에, 어떤 이들은 바다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2013 춘계 희망기원 만리포 만인 입수대회’라는 이름의 행사입니다. ‘설마 진짜로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바다에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라는 의문을 가져봅니다. 행사 타임 테이블이 기재된 보도자료를 확인합니다.



희망용사 전우회는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40~50대 중년층으로 구성된 전우회로 수해민 생필품 지원, 긴급구호 활동, 독거노인 효도 방문 등 이런저런 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 단체입니다. 제 클라이언트를 비롯한 몇몇 기업들이 이 희망용사 전우회에게 활동 보조금을 지원해왔고, 매년 큰 행사가 열릴 때마다 CSR 차원에서 함께 참여하였는데, 오늘의 ‘춘계 희망기원 만리포 만인 입수대회’가 바로 그런 행사였던 것입니다. ‘희망 군가’와 ‘희망 함성’은 희망용사 전우회만의 고유 콘텐츠인 듯합니다. 


<그 바다에 들어가면, 희망이라는 염분을 맛볼 수 있을까요?>


‘희망의 기원지가 굳이 먼 바다여야만 했을까...’ 하는 헛된 사념을 가져보기도 합니다. 보도자료를 치우고 멍하니 창 밖을 바라봅니다.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만리포까지는 먼 길이 될 것 같습니다.


그만의 서글픈 주말 취재 블루스


차를 운전하는 건 오랜만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와 헤어진 뒤로는 차를 몰지 않았습니다. 조수석에 앉아 글로브 박스 안을 뒤적거리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를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블루스 음악을 좋아했는데, 제 차의 글로브 박스에 블루스 명반들을 잔뜩 넣어두고는 “선배는 어떻게 운전하면서 BGM도 안 까냐? CD 몇 장 가져왔으니까 자주 들으면서 내 생각 많이 해”라고 말했었습니다. 라디오나 음악을 듣지 않는 건 제 운전 습관이었습니다. 예민한 운전자인 저에게는 무척이나 거슬렸거든요. 그러나 그녀의 CD들은 달랐습니다. ‘블루스... 참 멋진 음악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으로 사랑으로 나를 겁주지 말아요 그대. 그냥 나와 함께 빗속을 걸어요.

(Don't threaten me with love, baby. Let's just go walking in the rain.)

빌리 홀리데이 / 출처: Amazon>


글로브 박스를 열어 그녀의 CD 한 장을 꺼냅니다. 플레이(▶). 블루스 뮤지션들의 명곡들이 수록된 컴필레이션 음반입니다.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우울한 일요일)’가 흐르자 재빨리 다음 트랙으로 넘겨버립니다. 오, 이런... 다음 곡마저 베시 스미스(Bessie Smith)의 ‘스퀴즈 미(Squeeze Me, 나를 쥐어짜줘요)’라니... 신경질적으로 다음 곡 버튼(▶▶)을 수 차례 누르다가 겨우 멈춥니다. 다시 빌리 홀리데이. ‘아임 어 풀 투 원트 유(I’m a Fool to Want You, 당신을 원하는 난 바보랍니다)’는 도저히 그냥 넘겨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빌리 홀리데이의 흐느끼는 듯한 보컬이 차 안에 끈적한 공기를 채웁니다. 


<빌리 홀리데이의 ‘I’m a Fool to Want You’>


홀리데이, 오, 홀리데이... 


저는 그저 멍하니 듣습니다. ‘지금 내 두 손이 올라가 있는 이 운전대가, 사실은 내 마음이 아닐까... 직진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차선을 벗어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저는 지금 동서울 톨게이트를 지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있습니다. 만리포까지는 아직 먼 길입니다.


(1부 끝. 2부가 기대되시면 댓글을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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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윤톡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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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 2013.04.17 09: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 홀리데이.... 뭔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단편 소설 같아요 ㅠㅠ

  2. _ing 2013.04.17 1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2부 대박 기대!! 빨리 2부 올려주세요!! 현기증난단 말이에요!!!!

  3. BlogIcon C 2013.04.17 14:0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오....이거 신선한데요!! 이대로 끝내지 말아주세요!!! 2부를 올려달라!!

  4. it4444 2013.04.23 15:3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매력적인 글발에 빨려 들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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