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7.

디자인 본질에 대한 돌직구,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내부자나 관계자보다 제삼자의 시각이 요긴할 때가 있습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했던가요. 무언가를 기획하거나 창작하는 일을 하다 보면, 시나브로 ‘나’와 ‘우리’의 틀에 갇혀 맥락을 놓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나’나 ‘우리’의 일(업무)과 무관한 사람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이 좋죠. 그래서 어느 소설가는 원고를 탈고한 뒤, 출판사 편집자가 아니라 아내에게 먼저 검수를 받는다고 들었습니다. 아내가 “OK” 하고 나서야 편집자에게 최종 원고를 넘긴다는 것이죠. 그 소설가의 아내는 꽤나 공사 분명한 성격이라, 남편의 원고를 ‘아내’로서가 아니라 객관적인 ‘평가자’로서 철저히 검토해준다더군요. 


기획자가 기획하고, 창작자가 창작한 결과물들은 결국 ‘수용자’를 위한 것입니다. 수용자는 기획자나 창작자와 이해관계가 없는 제삼자라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창작하는 일이 이루어지는 동안, ‘나’와 ‘우리’의 눈뿐만 아니라 제삼자의 눈도 추가된다면 보다 다각도로 작업물을 프리뷰 해볼 수 있겠죠. “우리가 새로운 것을 내놓기 전까지 소비자들은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라고 단언했던 누군가와 같은 창조적 ‘자뻑’과 악마적(?) 추진력이 없다면, 제삼자의 시각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입니다. 


디자인 회사에서 일하지만, 디자인과 관련 없는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으로서, 저 자신을 제삼자의 범주에 포함시키고 싶습니다. 소설 쓰는 남편과 한집에 살지만, 소설은 쓰지도 않고 써본 적도 없는 아내처럼 말이죠. 



디자이너 아닌 제삼자에겐 멀게 느껴지는 한국 디자인 잡지 


사무실에 이런저런 디자인 잡지들이 비치되어 있어 종종 훑어보곤 합니다. 주로 국내외 디자이너들의 인터뷰를 읽는 편인데, 매체는 달라도 독후감은 대개 비슷합니다. ‘거리감’인데요. 디자이너, 혹은 디자인 분야 종사자들이 타깃 독자층일 테니 당연한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디자이너도 아니고 디자인과 무관한 일을 하는 독자로서, 그 거리감은 단순히 ‘멀다’라는 차원이 아니라, ‘높은’ 오르막길 같은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타깃 독자가 아닌 저 같은 일반 독자들도 디자인과 아예 관계가 없지는 않을 겁니다. ‘디자인’의 혜택을 받고 있고, 또한 소비하고 있으니까요.


국내 디자인 잡지들 속의 여러 기사가 ‘사용자들의 편의를 위한 디자인’을 언급하고 있더군요. 디자인 잡지 독자들 가운데 ‘사용자’ 아닌 사람은 없을 텐데, 정작 디자인 잡지들은 ‘사용자(독자)들의 편의’가 배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만, 그들의 방식으로만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요~? 때때로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듯한 기사 제목과 기술 방식은 거부감까지 들게 합니다. ‘디자이너가 정말 저렇게 위대한가?’라는 의문이 생기게 되죠. 물론, 위대한 디자이너는 존재합니다. 그 위대함은 ‘사용자’가 있기에 가능한 것일 겁니다. 디자이너의 위대함은, 디자인이라는 한 영역에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이 몸담고 있는 세계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디자이너 역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고, 또한 이 세계를 보다 아름답고 편하게 만드는 사람이죠. 그렇다면 디자인계의 다양한 이슈들은 우리가 사는 ‘지금, 여기’에 대한 이야기일 테고, 가급적 많은 사람과 공유될수록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디자인 잡지 같은 매체의 역할이 중요하겠죠. 거리감을 좁히는 일은, 우선 오르막의 각도를 내리는 데서부터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디자이너들을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로 그리기보다는, 디자인계에(만) 통용되고 있는 그들의 관념적 지위―디자이너들에게는 훌륭한 멘토이자 선구자이겠지만,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인물. 그러나 그 인물은 ‘일반인’을 위해 디자인을 해왔다는 점을 잊는 순간, ‘관념적 지위’는 더욱 견고해지겠죠―를 끌어내려 일반 독자, 즉 사용자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도록 배려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입니다. 




“디자인은 세상을 구하지 못한다. 하지만 보기 좋게는 만들 수 있다”라고 적혀 있는 티셔츠 

/ 출처: WordsBrand



“디자인은 끊임없이 사유하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한다”


뜬금없이 국내 디자인 잡지에 대한 아쉬움을 적어보게 된 계기는 한 권의 책 때문입니다. 철학자가 쓴 디자인 서적인데요. 책 자체보다는 저자의 이력에 눈길이 가 고르게 된 책입니다. 철학이 아닌 디자인을 강의하는 철학자?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 전공과 상관없는 과목을 가르치는 이 철학자는 혹시 괴짜인 걸까요? 프랑스의 ‘에콜 불(ECOLE BOULLE)’이라는 미술디자인학교에 가면 이 선생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학교의 인터랙티브 크리에이션 학과장이기도 한 스테판 비알(Stéphane Vial)인데요. 국내에는 <바칼로레아>라는 철학 수험서와 더불어 두 권이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중 한 권이 이 글에서 다루고 있는 주인공입니다. 2012년에 홍시 출판사에서 처음 나왔고, 올해 3월에 커버 디자인이 바뀌어 새롭게 출간된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입니다. 저자에 끌려 선택했고, 목차를 훑어보고는 잘 골랐다고 확신했습니다.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 2012년판(왼쪽), 2014년판 표지 / 출처: 네이버 책


서문 -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제1장 디자인의 역설 - 디자인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디자인

제2장 무질서의 역사 - '디자인'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제3장 디자인과 범죄 - 추한 것은 잘 팔리지 않는다

제4장 자본을 넘어 - 미치지 않으려면, 꿈꾸게 하려면

제5장 디자인 효과 - 디자인의 본질 세 가지

제6장 프로젝트 작업 - 디자이너의 창조 방식에 대하여

제7장 디지털 디자인 - 인터랙티브 혁명의 영향

제8장 미래의 디자인 - 어떤 혁신을 이룰 것인가?

제9장 생각하는 사물 - '디자인적 사고'라는 개념에 대하여

후기 - 디자인의 철학 체계



1장, 2장, 5장의 제목과 부제가 눈에 확 들어오더군요. ‘디자인’이라는 것에 대한 본질을 캐묻고 파고드는 책일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습니다. 다 읽고 난 뒤의 감상은, 캐묻기보다는 그냥 묻고, 파고들기보다는 그냥 들어가는 내용이었습니다. 148페이지 분량인데 너무 많은 걸 바랐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묻고’ (문제 제기) ‘들어가는’ (사유) 게 어디인가요? 게다가 그 주체가 철학자라면 믿어볼 만하지 않을까요? 


우리나라 디자인 잡지를 읽으며 보이지 않는 벽을 체감해온 저로서는, 이 책의 돌직구와 같은 한 문장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디자인은 끊임없이 사유하지만, 그 자신에 대해서는 사유하지 못한다”


또 이런 구절은 어떤가요.


디자이너는 한없는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그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일련의 복합적인 제약과 규범에 종속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용자들의 판결과 혹독한 비판에 매여 있다. 그는 자신의 고유한 욕구-이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작업의 필수 조건이다-가 아니라 타인의 욕구를 토대로 작업한다. 그 까닭은 그가 고안하는 물건이 근본적으로 타인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고 이런 자격에서 타인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항상 자신의 방식을 증명하고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해야 한다. 예술가는 형태나 색채, 질감에 대한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기 위해 아무런 설명을 할 필요가 없지만, 그와는 반대로 디자이너는 자신의 선택이 타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선택으로서 객관적으로 인정받도록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이 대목은 단지 디자인에만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고객’과 ‘의뢰인’을 상대하는 직장인이라면 여러 번 곱씹어봐야 할 내용이죠. “자신의 선택이 타인들에게 의미가 있는 선택으로서 객관적으로 인정받도록 이유를 제시”하는 일이란, 저 같은 클라이언트잡 종사자가 늘상 고민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매일같이 타인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사회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선택’과 ‘나다움’을 객관적으로 인정받도록 이유를 제시하기. 참 어려운 일 아니던가요? 


 

디자인 가르치는 철학자, 스테판 비알 / 출처: Stephane-Vial.net


다시, 디자인 잡지 독자로서 한 말씀 드리자면, 한국 디자인 잡지들도 위 인용문에 강조된 고민을 더 깊게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느 디자이너 선생님으로부터 “더 덜어낼 게 없는 것이 좋은 디자인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디자인 수혜자로서, 그리고 소비자로서 아무리 생각해도 멋지고 맞는 말입니다. 현재 한국 디자인 잡지들도 좀 더 디자인의 본질에 가까운 ‘디자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덜어내기’ 말입니다.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좀 더 키를 낮추어 여러 독자와 소통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무엇보다도, ‘디자인’이 디자이너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 본질을 잊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여서, <철학자의 디자인 공부>처럼, <공대생의 디자인 공부>, <클라이언트잡 종사자의 디자인 공부>, <공무원의 디자인 공부> 등등 다양한 제삼자의 시각이 반영된 디자인 논제들이 디자인 잡지에서 지속해서 다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