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26.

같은 영화, 다른 글씨? 영화 포스터 속 타이틀 디자인 전격 해부!



“아빠 딸로 태어나서 고맙습니다.”


누적관객 1,200만을 넘으며 역대 한국영화 흥행순위 3위에 오른 ‘7번방의 선물’의 명대사죠. 동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진한 감동으로 눈물콧물 적잖이 쏟아내신 분들 많을 거라 생각해요. 저 역시도 뜨겁게 차오르는 눈물 억지로 삼켜가며 지켜봤으니까요. ^^; 



<출처 : 네이버 영화>


국내 영화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이 영화 ‘7번방의 선물’ 이제 한국을 넘어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3월 8일 LA에서 개봉 후 현재까지 순항 중이며, 2월에 열린 베를린 국제영화제 마켓상영을 통해 해외에 첫 선을 보인 뒤 일본, 홍콩, 태국 등 아시아권에서 이미 판권이 팔렸다고 하더군요.


7번방의 선물처럼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은 우리나라에 해외영화들이 개봉하는 것처럼 오래 전부터 해외 영화제나 마켓 등을 통해서 꾸준히 있어왔고, 최근에는 영화뿐 아니라 감독이나 배우들도 해외 영화 시장으로 진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화들의 해외 마케팅을 위해서는 자연스레 현지언어로 된 홍보물 제작이 필수라 할 수 있는데요. 그 홍보물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영화의 이름이나 타이틀 로고의 디자인이 바뀌기도 한답니다. 같은 영화이지만 나라마다 문화와 문자의 형태가 다르고, 또 그 문자가 소리를 표현하는 ‘표음문자’인지 뜻을 표현하는 ‘표의문자’인지에 따라 표현의 제한이 생기기 때문인데요. 한때 ‘복수자연맹’으로 번역되었던 ‘어벤져스’의 중국 포스터가 화제가 되기도 했었죠. 원 뜻을 담기 위한 것이겠지만, 왠지 모를 코믹함이 느껴진 건 저 뿐만의 일은 아니겠죠.


같은 영화, 다른 글씨. 헐리웃 영화는 어떨까?


<좌측 어벤져스 미국 포스터, 우측 어벤져스 중국 포스터 / 출처 : 좌측 - 네이버 영화, 우측 - MoviePosterDB>


‘어벤져스’ 같은 헐리웃 블록버스터 영화는 해외의 여러 나라에서 동시 개봉되는 일이 많은데요. 다국어 폰트를 개발하고 있는 저는 ‘복수자연맹’ 포스터를 보면서 각 나라마다의 포스터 속 타이틀 로고 디자인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졌답니다. 그래서 바로 찾아봤습니다.


<좌측 어벤져스 일본 포스터, 우측 어벤져스 그루지아 포스터 / 출처 : MoviePosterDB>


가타가나로 표기된 일본어 포스터와 그루지아 문자로 표기된 그루지아 포스터입니다. 일본어 가타가나는 직선적인 느낌을 강조해 타이틀 로고를 표현했는데요. 이에 반해 문자의 특성상 동글동글해 보이는 그루지아 문자와 특징이 대비되어 보입니다. 그래도 영문 포스터와 같이 첫 글자를 크게 하고 원형의 선을 넣어 통일성을 주었군요. 일본 포스터는 다른 나라와 달리 캐릭터가 강조되어 보이는 것도 다른 점인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좀 더 친숙한 가타가나의 각지고 날카로운 느낌의 디자인이 액션영화의 이미지와 오리지널 영문 타이틀의 느낌을 잘 살린 것 같습니다.


<좌측 어벤져스 이스라엘 포스터, 우측 어벤져스 한국 포스터 / 출처 : 좌측 - MoviePosterDB, 우측 – 네이버 영화>


이스라엘 포스터도 한번 볼까요? 이스라엘에서 사용하는 히브리어는 아랍어와 같이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쓰는 글자입니다. 그래서인지 영문 타이틀의 원형과 A의 속에 있는 화살표 이미지가 오른쪽 첫 글자에 있는데요. 비교적 간결하고 장체의 구조로 디자인된 것이 영문 타이틀의 느낌을 잘 반영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개봉했을 당시 쓰였던 어벤져스 포스터도 함께 살펴보죠. 글자 하나하나의 형태가 옆으로 나열되는 ‘풀어쓰기’ 구조의 다른 글자들과는 달리, 각각의 자모음이 2개 이상 모여서 쓰이는 ‘모아쓰기’ 구조인 한글은 세로로 길쭉길쭉한 장체보다는 옆으로 넓은 평체로 디자인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장체로 느껴지는 영문에 비해서 느긋해 보이긴 하지만, 영문 ‘A’, ‘E’, ‘G’에서 보여지는 특징이 글꼴에 비교적 잘 녹아 있습니다.


<좌측 레미제라블 미국 포스터, 우측 레미제라블 한국 포스터 / 출처 : 좌측 - MoviePosterDB, 우측 – 네이버 영화>


‘레밀리터리블’ 패러디를 낳을 정도로 얼마 전 국내에서 큰 흥행을 한 영화 ‘레미제라블’도 전세계 여러 나라에서 개봉되었습니다. 원래의 영문 타이틀은 사극의 느낌과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뜻이 담기도록 세리프 서체를 바탕으로 거친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는데요. 우리나라 포스터에서는 유명한 배우들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영문과 마찬가지로 세리프 서체와 질감이 있는 타이틀 로고로 그 느낌을 잘 전달하고 있습니다. 영문에 비하면 좀 더 장엄하고 무게 있는 타이틀 로고 디자인이 네 배우의 클로즈업된 사진과 더 잘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좌측 레미제라블 중국 포스터, 우측 레미제라블 대만 포스터 / 출처 : MoviePosterDB>


같은 한자 문화권인 중국과 대만의 레미제라블 포스터는 생각보다 서로 많이 달랐는데요. 같은 한자라도 중국은 1960년대 중국공산당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좀더 간결한 형태의 ‘간체’를 사용하고, 대만은 원래의 한자인 ‘번체’를 사용하다 보니 생긴 차이 같기도 합니다. 자세히 보면 왼쪽에서 두 번째 글자(뭐라고 읽는 건가요? ^^;)가 형태가 다릅니다. 중국의 디자인이 영문의 질감과 이미지를 더 잘 반영하고 있지만, 아지랑이처럼 들어간 디자인이 저는 좀 몽환적으로 느껴지는군요.


<출처 : MoviePosterDB>


이 밖에도 많은 헐리웃 영화들이 여러 나라에서 개봉하고 있는데요. 그 중에서 독특한 문자로 디자인된 영화와 포스터를 몇 가지 골라봤습니다. 영문의 타이틀 로고의 느낌이 잘 살아있는 포스터도 있고, 전혀 다른 느낌으로 디자인된 포스터도 있습니다. 이란의 아랍문자나 태국의 태국문자는 영문과 그 구조와 표현양식이 달라서 영화의 느낌을 재해석하거나 비슷한 듯 다르게 표현한 것 같더군요. 아, 읽을 수 없어서 어떤 의미로 쓰인 건지 알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아쉽습니다. ㅠㅠ


같은 영화, 다른 글씨. 우리나라 영화는 어떨까?


얼마 전 6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최우수 작품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피에타’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영화인데요. 이렇게 해외에서 활약하는 국내영화는 어떻게 포스터와 타이틀 로고가 만들어졌을지 궁금해서 더 찾아봤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헐리웃 영화들과는 달리 우리나라 영화의 해외 포스터들은 그 이미지와 타이틀 로고가 생각보다 많이 달랐습니다. ‘피에타’의 경우 글자의 날카로운 세리프들이 붉은색과 어울려서 영화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는데요. 어찌 보면 호러 영화의 느낌이 나기도 합니다. 해외 포스터에서는 좀 더 정리된 세리프 글꼴과 엷은 회색톤, 밝아진 배경 이미지로 국내 포스터에 비해서 성스러운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도둑들’의 한글 타이틀 로고는 이탤릭의 기울어진 서체에 날렵한 느낌을 주는 세리프가 영화의 액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원래 낱자로 떨어져 보이는 글자를 연결한 디자인은 10명의 도둑들이 함께 걸어가는 포스터의 이미지를 이어주는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영문 타이틀 로고는 한글에 비해서 그 성격이 단조로워 보이네요. 그러나 소문자 ‘I’의 점을 다이아로 표현해 도둑들이라는 영어 단어의 느낌을 잘 전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긴장감과 액션이 더 표현되도록 하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출처 : 광해 – 네이버 영화 / 늑대소년 – 네이버 영화>


최근 개봉하는 한국영화의 타이틀 로고는 캘리그래피 스타일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붓글씨가 주는 감성과 그 자유로운 표현으로 인해 영화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화의 타이틀 로고가 영문이나 다른 문자로 제작될 때에는 일반적인 서체로 디자인되는 경우가 많아 보입니다. 각 나라마다 번역되는 제목의 느낌을 전달할 때 가장 적합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한글 캘리그래피의 아름다움을 다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2007년에 개봉한 영화 ‘밀양’은 캘리그래피로 디자인된 느낌을 영문판 해외 포스터에도 적용을 했는데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포스터와 잘 어울리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하고 있어서일까요? 한글 캘리그래피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움과 밀양이라는 단어, 영화가 내포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한국을 대표하는 두 감독, 박찬욱과 김지운의 최근 개봉작 포스터 역시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 디자인의 포스터와 타이틀 로고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스토커’의 한글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도둑들’처럼 글자들이 연결되면서 보여지는 기묘한 형태가 영화의 포스터와 잘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영문포스터의 타이틀 로고는 한글과 다른 느낌이지만 비슷하지만 색다른 레이아웃의 배경이미지와 맞물려 나름의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출처 : MoviePosterDB>


‘라스트 스탠드’는 영문 포스터가 이미지와 타이틀 로고가 잘 어울리는 포스터 인 것 같습니다. 주인공이 굳건하게 서있는 이미지가 영문 타이틀 로고의 탄탄한 장체 느낌의 서체와 잘 맞는 것 같습니다.


이 두 영화는 앞서 소개해드린 국내 영화와 달리, 해외에서 먼저 개봉한 후 국내로 들어오면서 영문 로고에서 한글로 디자인된 케이스인데요. 일관성 있는 로고 스타일을 유지하는 헐리웃 영화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영화가 개봉되지는 않았지만, 헐리웃에 진출한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어떤 느낌으로 디자인 될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해외여행을 나가면 누구든 애국자가 된다고 하죠. 저는 해외에 나가지 않고서도 늘 애국의 마음을 품고 있답니다. 다국어 폰트를 제작하면서 다른 나라의 문자들을 굉장히 많이 접하게 되는데, 작업을 할 때마다 한글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느끼곤 한답니다. 다양한 나라의 문자로 디자인된 영화 포스터를 보다 보니 좀 더 애국심에 불타오르는 것 같군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자, 글꼴을 만드는 폰트 디자이너로서 앞으로도 한국 영화가 세계적으로 사랑 받고, 세계의 다양한 문자로 디자인된 포스터들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